[사라지는 세계 장수촌]<2>일본 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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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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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입맛에 길든 50년… 중년 사망률 전국 1위 ‘쇼크’

패스트푸드점 불야성 오키나와 중심지인 나하 시 고쿠사이도리(국제도로)의 밤을 환하게 밝히면서 24시간 영업을 하는 패스트푸드점.
패스트푸드점 불야성 오키나와 중심지인 나하 시 고쿠사이도리(국제도로)의 밤을 환하게 밝히면서 24시간 영업을 하는 패스트푸드점.
《 일본 서남단에 있는 오키나와(沖繩) 섬. 섬 전체가 현을 이루는 이곳의 중심 도시인 나하(那覇) 시 종합운동공원에는 ‘세계 장수지역 선언비’가 있다. 1995년 8월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오키나와가 세계 최고의 장수지역 중 하나로 검증받은 뒤 세운 기념비다. 이 기념비가 말해주듯 오키나와 섬은 장수촌의 대명사 중 하나였다. 고야(쓴 오이), 시쿠아사(귤 모양의 레몬 일종) 등 섬에서 나는 채소와 과일로 만든 전통식단을 유지한 덕분에 다들 장수했다. 아열대 기후로 1년 내내 따뜻하고 대중교통이 미비해 주민들의 일상 운동량이 많았던 것도 주요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지난주 기자가 공원을 벗어나 시내로 접어들자 24시간 영업하는 패스트푸드점과 패밀리레스토랑의 간판 조명으로 도시 전체가 밤을 잊은 듯했다. 주택가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건강식의 대명사였던 오키나와 전통음식점은 인적이 한적한 뒷골목에서나 찾을 수 있었다. 》
장수촌 오키나와의 명성이 퇴색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였다. WHO로부터 세계 최고 장수지역으로 선정된 지 불과 7년 뒤인 2002년 2월. 오키나와 현은 일본 후생노동성이 2000년에 실시한 전국 평균수명 조사 결과 발표에 큰 충격을 받았다. 오키나와 남성의 평균수명이 전국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 중 26위(77.64세)로 곤두박질쳤기 때문이다. 이른바 ‘26 쇼크’다.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피해가 뒤따랐다. 오키나와 경제의 핵심인 관광과 건강식품 관련 산업이 타격을 받기 시작한 것. 경력 20년째라는 나하 시의 한 택시운전사는 “장수촌 브랜드는 오키나와 관광산업의 키워드로 이 브랜드가 훼손되면 하와이나 괌 등 태평양의 다른 섬에 비해 더 나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고 말했다.

‘26 쇼크’의 원인으로는 패스트푸드 확산 등 서구식 식습관 변화가 첫손가락에 꼽혔다. 자동차 보급도 또 다른 원인이었다. 전철 등 대중교통수단이 부족한 상태에서 자동차 보유가 일반화되면서 주민들의 운동량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서구식 환경변화와 운동부족은 비만을 가져왔고, 비만은 질병으로 이어졌다. 2008년 정부 조사에서 오키나와는 20∼69세 남성 비만율이 46.7%로 전국 47개 도도부현 중 가장 높았다. 여성은 40∼69세 비만율이 39.4%로 전국 1위였다. 당뇨병과 간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은 남녀 모두 전국 1위였다. 같은 해 건강진단을 받은 오키나와 주민 중 생활습관을 바꾸기 위해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비율도 5명 중 1명꼴인 21.3%로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나하 시 최대 번화가인 고쿠사이도리(國際通り·국제거리)의 맥도널드 햄버거집에서 기자가 만난 여중생은 “학교 급식 때 햄버거가 나오면 친구들이 대환영이지만 고야 찬푸루(쓴 오이를 위주로 한 나물무침) 등 채소 위주의 전통 음식이 나오면 절반 이상 남긴다”고 말했다.

오키나와에는 패스트푸드점이 일본 본토보다 10년이나 빠른 1960년대에 상륙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동물성 지방이 많은 통조림 등 미군들의 식습관이 급속히 확산됐기 때문이다. 서구식 식습관은 양날의 칼이 됐다. 전후 배고픔을 해소해 줬지만 ‘장수 왕국’이라는 명성에 서서히 치명적 내상을 입히기 시작했다. 패스트푸드로 자라난 아이들이 중장년층이 되면서 오키나와는 최근인 2005년 조사에서 65세 이하 사망률이 전국 47개 도도부현 중 남성은 1위, 여성은 5위로 종합 1위에 오르는 불명예를 안았다.

미야기 신유(宮城信雄) 오키나와의사회 회장은 “결국 비만이 수명 단축의 주범”이라며 “전통적인 식생활을 유지하면서 체중을 관리하고 있는 70세 이상 노인들은 지금도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26 쇼크’ 이후 현 정부는 ‘건강 오키나와 2010 추진 현민회의’를 설립해 대대적인 명예 회복 운동을 시작했다. 오키나와 현 시모지 야스토(下地康斗) 건강만들기 반장은 “10년 전부터 건강증진 계획을 만들어 젊은층과 중년층 등 한창 일할 연령대의 식생활과 음주, 흡연 등 생활습관을 개선하는 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오키나와는 ‘26 쇼크’ 5년 뒤인 2005년 조사에서 평균수명이 전국 25위로 한 계단 올라섰다. 하지만 갈 길은 아직 멀다.

오키나와 현은 지난해 ‘건강 오키나와 21’ 행동계획을 확정하고 더욱 강력한 생활 속 실천 운동에 나섰다. 핵심은 건강 9개조. △아침식사를 거르지 말자 △하루 한 번 체중을 재자 △지금보다 10분(1000보) 더 걷자 △푹 쉬고 스트레스에 잘 대처하자 △금연하자 △치아를 잘 관리하자 △간이 쉬는 날을 정해 술을 줄이자 △건강검진을 받자 △건강 장수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내용이다.

보건 의료 복지 교육 언론 등 현 내 거의 모든 조직이 망라된 ‘건강응원단’이 결성돼 9개조 실천 운동에 나섰고 현 영양사회는 고야 등 전통재료를 활용한 식단 개발로 측면 지원에 나섰다.

오키나와장수과학연구센터 회장을 맡고 있는 스즈키 마코토(鈴木信) 류큐대 의학부 명예교수는 “좀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액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스즈키 교수는 1990년 이후 평균수명조사에서 4회 연속 남성 전국 1위를 차지한 나가노(長野) 현에 주목했다. 나가노 현은 1998년 겨울올림픽을 개최했을 정도로 추운 지역이어서 과거에 주민들의 염분 섭취가 과다했고 이로 인해 고혈압 등 성인병이 많았던 지역이다. 하지만 현에서 건강지도위원회를 만들어 집집마다 일일이 다니면서 매일 먹는 음식물의 염분을 확인하고 적정량을 권고한 이후 고혈압 환자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설명이다.

야모리 유키오(家森幸男) 교토대 명예교수도 1983년부터 20년간 세계 25개국 60개 장수촌의 식생활을 조사한 뒤 유전 요인보다 식생활이 장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오키나와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학교 수업시간에 땀에 젖은 채 오키나와 거리를 단체로 구보하는 학생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밤거리를 밝히는 패스트푸드점은 여전히 성황이다.
▼ “우린 전통밥상을 ‘생명의 약’이라 부른다” ▼


■ 장수 명성 유지하는 오키나와 북부 오기미村

오키나와의 대표적 장수촌인 오기미 촌 기조카 마을의 노인회장인 긴조 마사하루 씨(오른쪽) 부부가 과일과 채소 등 전통 재료로 만든 담백하고 간소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오키나와의 대표적 장수촌인 오기미 촌 기조카 마을의 노인회장인 긴조 마사하루 씨(오른쪽) 부부가 과일과 채소 등 전통 재료로 만든 담백하고 간소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오키나와 중심지인 나하 시에서 버스로 3시간 반 떨어진 북쪽 해안가의 오기미(大宜味) 촌. 오키나와 현 전체의 장수촌 브랜드가 크게 훼손됐지만 인구 3200여 명인 이곳은 여전히 장수촌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100세 이상 인구는 지난해 15명으로 전년보다 1명 늘었다. 마을 입구의 장수비 내용이 재밌다. ‘이곳에서 80은 어린아이, 90이 되어 (하늘에서) 마중 나오면 100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며 쫓아버린다….’

동중국해 바다가 펼쳐져 보이는 산속 언덕 위 외딴집에서 부인과 살고 있는 오기미 촌 기조카(喜如嘉) 마을 노인회 회장 긴조 마사하루(金城正治·70) 씨는 오기미 촌 장수 비결로 3가지 키워드를 꼽았다. 시쿠아사(귤 모양의 레몬), 바쇼(파초·바나나 나무를 닮은 식물), 부나가야(도깨비)다.

그는 “시쿠아사는 혈압과 당뇨에 좋아 하이비스커스(허브향이 나는 열대 꽃나무)와 섞어 차를 만들어 매일 마시는데 이곳에서는 수명을 늘리는 ‘마법의 차’로 불린다. 바쇼 줄기로 직물을 만들 때는 손작업이 많아 뇌가 활성화되고 장수에 도움이 된다. 부나가야는 지역만화에 나오는 숲에서만 산다는 꼬마도깨비다. 그만큼 오기미 촌의 자연이 풍부하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전통적인 생활방식이 오기미 촌의 장수 유지 비결이라는 것이다.

오기미 촌의 일상도 장수 비결이다. 이곳 노인들은 오전 5∼6시면 마을회관이나 몇몇 집에 옹기종기 모여 시쿠아사 차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때 간밤에 있었던 일이나 꿈 이야기를 하면서 혹시 못 나온 사람이나 안색이 안 좋은 사람은 없는지 살핀다.

각자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한 뒤 할아버지들은 앗다이구아(작은 밭)로 향한다. 할머니들은 함께 모여 바쇼 직물을 짠다. 햇볕이 뜨거운 오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쉰 뒤 서늘한 저녁에 다시 모여 게이트볼이나 그라운드골프로 하루를 마감한다.

이곳에서는 노동도 하나의 놀이다. 고야나 시쿠아사 수확철이 되면 노인회 주최로 품질 경연대회를 연다. 상품은 비료 몇 포대이지만 축제 분위기의 경연대회를 기다리며 밭일에 정성을 쏟게 된다. 긴조 회장은 “아이들은 명절 때나 찾아오지만 노인들이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다”며 “일본에서 유일하게 고독사가 없는 지역일 것”이라고 말했다.

긴조 회장의 부인 시즈에(靜江) 씨가 오기미 촌의 점심상을 내왔다. △시쿠아사와 아카바나(바늘꽃)를 넣어 만든 붉은 밥 △돼지고기와 갖은 나물을 넣어 끓인 국 △시쿠아사를 넣고 기름기 없이 담백하게 조린 삼겹살 한 점 △무, 쑥, 파파야 등 주변에서 수확한 채소와 과일 무침으로 주변의 전통 재료를 활용한 식단이었다. 후식은 시쿠아사 젤리였다.

긴조 회장은 “오기미 촌의 밥상은 오키나와 말로 ‘누치구수이’(생명의 약)다”라며 “생명은 보물(누치도다카라)”이라고 말했다.

오키나와=글·사진 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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