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동빈 기자의 세상만車]인간, 자동차의 속도를 탐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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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5월 30일 독일 베를린 근교 아부스에서 열린 자동차 경주대회를 현실감 있게 재현한 그래픽. 당시 메르세데스벤츠와 아우토우니온의 경주용차가 치열한 경쟁을 펼친 끝에 벤츠가 우승했다. 메르세데스벤츠 제공
1937년 5월 30일 독일 베를린 근교 아부스에서 열린 자동차 경주대회를 현실감 있게 재현한 그래픽. 당시 메르세데스벤츠와 아우토우니온의 경주용차가 치열한 경쟁을 펼친 끝에 벤츠가 우승했다. 메르세데스벤츠 제공
 1938년 1월 2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남쪽 A5 아우토반에서 열린 ‘최고속도 대회’.

석동빈 기자
석동빈 기자
 히틀러가 아꼈던 아리아인 혈통의 베른트 로제마이어는 아우토우니온(아우디의 전신)의 속도기록용 자동차인 ‘스트림라이너’에 비장한 각오로 올랐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바람이 세지고 있다”고 경고했지만 그는 운전석에서 내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날 엎치락뒤치락 경쟁을 벌이던 루돌프 카라치올라가 메르세데스벤츠의 ‘W125 레코드바겐’으로 시속 432.7km까지 속도를 올려 신기록을 경신했기 때문이죠.

 기존 기록 보유자였던 28세의 로제마이어는 마지막 3차 시기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아 속도를 올렸고, 차체가 조금 흔들렸지만 침착하게 운전대를 조작해 1km 지점을 통과할 때는 카라치올라보다 0.2초가 빨랐습니다. 새로운 기록이 작성되는 순간을 기대하면서 수만 명의 관중이 숨을 죽였습니다.

 그 순간 스트림라이너는 갑자기 옆에서 불어온 바람에 왼쪽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속도는 시속 400km. 결국 차체는 공중으로 날아올라 크게 두 바퀴를 돌고 교각과 부딪쳤습니다. 로제마이어는 아내와 태어난 지 100일도 지나지 않은 아들을 남겨둔 채 그렇게 속도 안에서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그를 아꼈던 히틀러 독일 총통은 “훌륭한 전사를 잃었다”고 애도했습니다.

 1930년대는 역사상 속도 경쟁이 가장 치열하던 시대였습니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국민들의 사기를 올리고 세계에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해 자동차 경주를 전폭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속도는 힘의 상징’이라는 것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죠.

 약육강식의 원리가 철저히 지배하던 수렵시대에는 ‘빠른 다리’를 가진 자가 풍부한 사냥감을 챙기면서 생존 확률을 높였던 우성인자였습니다. 이후에도 인류는 항상 속도 경쟁에 몰입했고 빠른 무기를 가진 민족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부와 권력을 독차지했습니다. 남자들이 자동차의 속도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죠.

 하지만 자동차의 시초는 초라했습니다. 1886년 카를 벤츠가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은 자동차 ‘페이턴트 모터바겐’은 겨우 2마력에 속도는 시속 16km에 불과했습니다. 1908년 판매돼 미국 자동차 대중화를 견인한 포드의 ‘모델T’는 20마력에 시속 68km로 높아져 겨우 탈 만한 수준이 됐죠. 일반 승용차는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시속 150km 수준이 됐고, 1970년대에는 시속 200km, 1980년대에 300km를 넘기게 됩니다. 현재 가장 빠른 양산형 자동차는 부가티의 ‘베이론 슈퍼스포츠’로, 1200마력에 시속 430km를 기록했습니다. 물론 가격이 30억 원에 달해 가장 비싼 자동차이기도 합니다.

 비행기에 들어가는 제트엔진을 넣고 시속 1228km로 달린(사실은 땅에 붙어서 날아간) SSC(Supersonic Car·초음속자동차)도 있긴 합니다. 지상 최고속도인 이 기록은 내년에 깨질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 지리자동차가 투자한 영국의 ‘블러드하운드 SSC’가 시속 1610km(1000마일)에 도전할 예정이기 때문이지요.

 원시시대처럼 생존을 위해 빨리 달릴 필요가 없어진 현대 남성들은 이처럼 속도가 빠른 자동차를 탐닉하며 자신의 사회·경제적 파워를 뽐내곤 합니다. 특히 짝짓기가 끝나지 않은 혈기왕성한 젊은 수컷일수록 속도를 과시하려는 경향이 강하죠.

 하지만 멋진 배기음을 울리며 달리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내연기관 자동차의 창조주인 독일조차 환경오염과 자원 낭비를 이유로 아끼던 피조물을 관 속에 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독일 연방평의회는 10일 내연기관 자동차의 판매를 2030년부터 금지하는 법안에 합의했습니다. 실제로 법안이 의회를 통과할지는 미지수이지만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이에 앞서 네덜란드와 노르웨이도 2025년부터 내연기관 자동차의 판매금지를 추진 중입니다.

 앞으로 30년 뒤면 판매되는 차의 대부분이 전기차로 바뀔 것으로 예상됩니다. 전기차는 사실상 전자제품에 가까워서 기계식 자동차가 주는 아날로그적인 감성과 포효하는 엔진 배기음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 자리를 얼마나 빨리 충전되고 오래 주행할 수 있느냐는 현실적인 가치가 대체할 것으로 보입니다. 마초 스타일의 수컷들에겐 슬픈 소식이죠.

 그래도 너무 우울해하진 마세요. 자동차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전 인류가 올라타고 있는 놀이기구 ‘지구’의 자전속도 시속 약 1700km에는 아직 못 미치니까요.

석동빈 기자 mobidic@donga.com
#a5 아우토반#최고속도 대회#히틀러#아우디#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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