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성 교수의 소비일기]식품 유통기한, 믿음과 불신 사이

  • 입력 2008년 6월 11일 03시 00분


《우유가 떨어져 슈퍼마켓에 들렀습니다. 우유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네요. 게다가 하나같이 등에 짐을 진 것처럼 ‘보너스 상품’을 달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너스를 묶느라고 들어간 테이프 값이 한 달에 몇 억 원이라는 기사가 있더니 바로 이래서 나오는 말이었군요.‘차라리 조금씩 할인해 주면 테이프 값도 들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같은 값이면 보너스가 달려 있는 것으로 사자는 마음에 이것저것 둘러봅니다.》

고민 끝에 하나를 골라 유통기한을 확인합니다.

어, 적힌 날짜가 바로 오늘이네요. 왠지 망설여집니다. 유통기한이야 그때까지 판매할 수 있다는 뜻이니 오늘 사다 먹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라니 생산한 지 꽤 됐을 거라는 생각에 다른 건 없을까 여기저기 뒤져 봅니다. 언제나 진열대의 저 안쪽에는 유통기한이 많이 남은 상품들이 놓여 있곤 하거든요.

하지만 며칠 더 유통기한이 남은 우유를 골라 들었다가 내려놓고,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으로 바꿔 듭니다. 이걸 사는 게 유통기한의 취지를 살리는 데 조금이라도 일조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거창한 생각보다는 그냥 먹어도 되는 이 우유도 오늘이 지나면 갈 데가 없을 것 같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예전에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딸아이가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셨다며 우유 팩의 유통기한을 확인하는 것을 보면서 기특해 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듯 이제는 초등학생조차도 확인하는 유통기한을 확인하지 않는 소비자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식품의 유통기한을 변조하거나 마음대로 늘려 표시했다가 적발됐다는 황당한 기사가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식품정보를 사실과 다르게 적는 일이 꽤나 자주 벌어집니다.

식품표시는 소비자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통로입니다. 그리고 표시는 소비자와의 약속입니다. 생산자는 있는 그대로 포장에 표시해야 하며, 소비자는 포장에 쓰여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아무리 표시를 확인하려고 해도 잘 보이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흐릿하게 지워져 있기도 하고, 읽었지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내용도 많고, 또 너무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써놓은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거기에 쓰인 내용은 정확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하지 않은 정보가 유통되는 시장은 신뢰할 수 없는 시장입니다. 믿을 수 없는 표시를 붙인 채 상품이 유통될 때 우리 사회는 또 다른 비용을 추가로 지출하게 됩니다. 표시의 정확성을 감시해야 하는 비용, 그리고 겉(포장)과 속(내용)이 다를지 몰라 불안해야 하는 비용. 그런 쓸데없는 비용을 지출해야 하는 사회는 아무리 국민소득이 올라가도 결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없지 않을까요.

서울대 생활과학대 소비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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