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법]'영원한 소수파' 이영모 前 헌법재판관

  • 입력 2001년 3월 26일 18시 44분


《법이란 무엇인가. 22일 정년 퇴임한 이영모(李永模) 전 헌법재판관은 ‘법은 국민의 심장’이라고 말한다. 그는 퇴임식에서도 “헌법은 단순히 법 조항을 나열한 문서가 아니라 모든 국민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는 생명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는 50개월간 헌재 재판관으로 재임하면서 역대 재판관중 가장 많은 108건의 소수의견을 제시했다. 법조계 일부에서는 그의 소수의견이야말로 ‘국민의 다수의견’을 대변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국민의 가슴’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길지 않은 헌재 역사에서 ‘위대한 소수자’로 기억되는 이 전재판관을 ‘로 섹션’에 초대해 법이란 진정 어떤 것인지에 대해 탐구해본다.》

올리버 웬델 홈즈. 미국의 연방대법원 역사에서 ‘위대한 반대자’로 추앙받는 전설적인 판사다. 그는 20세기 초 32년간 연방대법원 판사로 재직하면서 완강한 보수주의자들과 맞서 사사건건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소수의견으로 내세운 그의 견해는 나중에 대부분 다수의견으로 바뀌어 미국의 운명과 미국 시민의 인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 예로 윌슨 대통령을 비난하는 책자를 발간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아브람스 등에 대해 연방대법원의 다수의견은 그런 책자 발간은 수정헌법 제1조(언론출판의 자유 규정)에 의해 보호되지 않는다고 했으나 홈즈는 반대의견에서 ‘진리에 대한 최적의 테스트는 시장의 경쟁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의 의견은 후에 ‘사상의 시장’이란 개념으로 보편화됐다. 범죄에 대한 공권력 개입의 가이드라인 격인 ‘명백하고 현존하는(Clear and Present) 위험’의 원칙도 그가 창안한 개념이다.

홈즈 판사의 신조는 ‘법의 생명은 법리(法理)에 있는게 아니라 경험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 대중쇼 공연을 보면서 “내게 이런 저질 취미를 갖게 해주신 하느님에게 감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영모 전재판관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재직할 때의 일입니다. 1억1000만원에 전세계약을 한 세입자가 잔금일에 1억원밖에 준비를 못하자 집주인이 계약위반을 이유로 세입자에게 위약금을 물리며 계약을 깬 사건이 들어왔죠. 배석판사들은 비슷한 판례를 분석해 금액에 따라 계약불이행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저는 달리 생각했죠. 겉으로 드러난 금액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세입자가 돈을 준비하지 못한 사연과 집주인이 계약을 깨려는 실질적인 이유를 살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그런지 많은 후배 법조인들이 그의 판결을 ‘살아있는 판결’이라고 평가한다.

지난해 4월 과외금지 조항의 위헌여부에 대한 그의 소수의견도 ‘경험’에서 출발한다. 70년대 말 그도 중학생이던 큰 아들에게 과외를 시키다 작은 아들이 중학교에 진학하자 둘 다 과외를 시킬 형편이 못돼 아예 포기를 했다. 90년대 초 서울고법원장으로 있으면서 유능한 후배 법관들이 자녀 과외비 부담 때문에 변호사로 개업하는 모습도 많이 봤다.

그는 과외금지조항 위헌 결정과정에서 “지금은 가진 자 스스로 자제하고 사회 경제적 약자의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할 시기”라며 “위헌 결정은 가난한 학부모나 자녀들에게 허탈감과 좌절감을 갖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99년 12월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지정제도의 위헌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일 때도 그는 위헌이라는 다수 의견에 맞서 환경권 수호 차원에서 존속돼야 한다(합헌)는 소수의견을 나타냈다.

역대 헌재 재판관들중 유일하게 법원의 판결도 위헌심판(헌법소원)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견해를 보였다.

후배 법조인들은 그의 의견을 모아 4월중 책을 펴낼 계획인데 책의 제목은 ‘소수와의 동행(同行)’.

그는 왜 반대할까.

“저는 학교보다 주로 책을 통해 인생을 배웠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사실(fact)과 규범(rule) 모두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사실과 규범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懷疑)하면서 그 시대와 상황에 가장 적합한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죠.”

그는 “다른 사람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어야 발전이 있는 법”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의 이력을 보면 학교 이외의 곳에서 더 많이 배운 흔적이 나타난다. 1936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그는 의령농고를 중퇴, 검정고시를 거쳐 부산대 법대를 졸업했다. 1960년 3월 의령군청에서 8급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며 이듬해 1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사는 방식에서도 그는 소수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78년 분양받은 서울 논현동 K아파트에서 20년 넘게 살고 있으며 식탁도 그 때 마련한 것을 그대로 쓰고 있다. 92년 공직자 재산공개때는 평소 즐겨타는 프라이드 승용차를 재산 목록에 신고했고 재산 총액도 법원에서 거의 말석을 차지했다. 그러면서도 후배 법관이나 법원 직원들과의 술자리는 마다하지 않아 ‘청렴방탕형’이란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소수자가 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과외금지조항 위헌결정 과정에서 소수의견을 내자 다수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다시 “과외문제를 다루면서 가진자와 약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등으로 가르는 의견은 자유민주주의 원리에서 볼때 오히려 독단적 견해”라고 이례적으로 재반론을 펴기도 했다. 이 전재판관은 “평의(합의)의 어려움은 황야의 외침과 같다”는 말로 그 어려움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홈즈 판사도 “법관은 혼자서 사막을 쓸쓸히 걷는 것과 같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그가 퇴임한 헌재 청사 오른쪽 벽에는 ‘법의 권리와 진리 수호’를 상징하는 그림이 있다. 그 그림 속에는 교통신호등 앞에 11명의 군중이 서 있는데 어린이를 제외하고 모두 어두운 표정이다. 이 전재판관은 “그 그림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 자유와 평등에 관한 우리 현주소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며 “그들을 밝게 웃도록 하는 것이 헌재 재판관의 책무라고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

이영호 재판관 주요 소수의견
시기사건이름의견
1999. 4택지소유상한 부담금합헌 (토지공개념과사회경제적 정의에대한 입법자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
1998.12그린벨트 제한합헌(환경권 보호)
1998. 7총리서리 위헌심판합헌
2000. 4과외금지조항합헌
2001. 2민사소송비용에관한 국가의 소송구조 여부위헌 (민사사건에도 국가가 서민의 소송구조해야 한다.)

▼이영모 전 헌법재판관 약력▼

▽1936년 경남 의령 출생

▽1956년 의령농고 2년 수료

▽1961년 13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1963년 부산대 법대 졸업.

서울지법 판사

▽1992년 서울고법 원장

▽1994년10월 헌재 사무처장

▽1997년1월 헌재 재판관

▽2001년3월 정년(65세) 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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