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Digital]"판결 기다리다간…" 가처분신청 급증

  • 입력 2000년 11월 23일 18시 28분


삶의 속도가 ‘생각의 속도’만큼이나 빨라진 21세기. 그러나 법은 느리기만 하다. 한번 소송을 내면 빨라야 6개월, 길게는 3년 이상이 지나야 정식 판결이 나온다. 그러면 그 사이 급하게 전개되는 법률분쟁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가처분(假處分)’제도가 더욱 절실해지고 가처분 사건이 급증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가처분은 민사소송법 규정에 따라 신속성이 요구되는 사안의 경우 법원이 확정판결을 내리기 전에 당사자의 청구에 따라 임시 결정을 내리는 것. 재판부는 개연성이 인정될 정도의 심증(心證)만 있으면 ‘일단’ 신청을 받아들여 상황을 정지시킨다.

탤런트 김희선씨가 낸 누드집 출판 금지가처분 신청이 최근의 대표적 사례. 김씨는 누드집 출판의 적법 여부를 놓고 소송을 진행중인데 판결이 나오려면 수개월 이상이 걸린다. 그러나 그 사이 책이 출판된다면 김씨는 나중에 소송에서 이겨도 그 피해를 회복하기 어렵게 된다. 이에 따라 김씨는 출판사와의 정식 재판이 끝나기 전에 일단 책의 출판을 금지시켜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사회변화에 따라 분쟁도 다양해지고 그에 따라서 가처분신청도 공사금지, 주주총회 금지, 철거금지, 통행방해금지, 저작권 상표권 특허권 침해금지 등으로 다양하게 늘고 있다. “걸면 걸린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 이익단체가 벌이는 거리시위 소음을 견딜 수 없다며 이웃주민이 낸 ‘확성기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도 있다.

최근 눈에 띄는 현상은 인터넷상의 배포금지와 인터넷 도메인이름 사용금지 가처분 등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분쟁에 대한 가처분 사건이 크게 늘어나는 것. 사이트 패쇄명령 효력정지 등 인터넷과 관련돼 심리가 진행 중인 사건이 서울지법에만 수십건에 달한다.

바쁠수록 가처분에 많이 의존하게 된다. 또 법원 가처분신청자 명단에는 바쁘기로 유명한 연예인들의 이름이 많이 나온다. 인기그룹 H.O.T.의 경우 자신들이 출연한 영화가 인터넷에 무단으로 상영되고 있다며 2건의 가처분 신청을 내놓은 상태이며 상표와 디자인의 무단 사용을 이유로 서태지 공연의상과 ‘서태지 향수’ 등에 대해서도 심리가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인간관계까지 ‘급하게’ 해결해 달라며 가처분에 기대는 경우도 많아졌다.

끊임없이 전화를 해 욕설을 퍼붓거나 원하지 않는 선물공세로 피해자를 괴롭힌 스토커들이 최근 잇따라 접근금지 및 전화금지 가처분 결정을 받았으며 65세 노모가 패륜아 아들을 상대로 같은 신청을 내기도 했다.

가처분 신청을 담당하는 서울지법 민사합의30부 황진구(黃進九)판사는 “고층건물의 공사금지 가처분의 경우 예전에는 소음, 분진을 막아달라는 주장이 대부분이었는데 최근에는 멋진 전망을 감상할 조망권이 침해된다는 이유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가처분 신청은 빠르면 1주일, 보통 한달 이내에 결정이 내려진다.

황 판사는 “당일날 열릴 주주총회를 막아달라는 가처분 신청이 급하게 들어올 경우 심리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마저 없어 법원으로서도 기각할 수밖에 없다”며 “무조건 내밀면 된다는 식의 신청은 받아들이기 어려울뿐더러 남용될 경우 상대편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할 소지도 있다”고 충고했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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