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 80]거함 기아號의 침몰(下)

  • 입력 1998년 10월 22일 19시 53분


97년 8월13일 서울시내 모 호텔.

기아그룹 김선홍(金善弘)회장과 한나라당 서상목(徐相穆)의원 임창열(林昌烈)통상산업부장관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았다.

서의원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김회장님, 사표를 낸다고 해서 바로 수리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또 은행은 사표를 받더라도 수리할 권한이 없고요. 사표수리 여부는 기아 이사회가 결정하는 데 뭘 걱정하십니까.”

임장관이 거들고 나섰다.

“채권단이 사표를 내라는 것은 부도유예협약 관련서류에 사표를 포함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표를 내더라도 계속 경영하실 수 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김회장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더 이상 자리에 연연하지는 않습니다. 사표를 낼 경우 기아가 받을 충격이 걱정스러웠을 뿐입니다. 사표를 내지요. 대신 먼저 부하직원들을 설득해야 하니 그 때까지 비밀로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이로써 7월15일 부도유예협약이 적용된 이후 한달 동안 정부와 기아가 팽팽히 맞섰던 ‘김회장 사표파동’은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날 비밀회동은 김회장과 같은 교회(서울 S교회)에 다녔던 서의원과 임장관이 제의해 마련된 것. 회동 직후 임장관과 서의원은 모두 크게 고무된 표정이었다.

임장관은 곧바로 강慶식(姜經植)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을 찾았다.

“김선홍회장이 사표를 내겠답니다.”

“글쎄요…. 김회장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닐텐데요.”

“사나이끼리 한 약속입니다. 반드시 (사표를) 가져올 겁니다.”

임장관은 통산부장관이었지만 재경원에 밀려 기아사태에 개입하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나선 것은 기아측이 강부총리를 ‘삼성의 승용차 진출 배후자’로 지목하는 바람에 정부와 기아 사이에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회장과 합의한 비밀보장 약속에도 불구하고 신한국당 출입기자들 사이에 회동사실이 곧바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신한국당으로서는 정부가 쩔쩔매는 김회장 사표문제를 자신들이 해결하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당시 이회창(李會昌)총재가 장남의 병역면제문제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처지였던 만큼 돌파구가 절실했을 수도 있다.

김회장 사표제출설이 알려지자 기아는 크게 당황했다.

기아는 14일 김회장의 사표제출 계획을 강력히 부인하고 나섰고 이총재의 기아 방문은 무산됐다.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임장관은 펄펄 뛰었다. 사표제출 철회를 알리기 위해 정부 과천청사의 통산부장관실로 찾아온 김회장의 측근에게 임장관이 말했다.

“뭐라구요. 신의를 저버리고 장관을 속이면서까지 회장 자리를 지키겠다고요. 김회장이 어떻게 되나 두고 봅시다. 돌아가세요.”

사태가 심상찮음을 감지한 김회장이 이날 오후 늦게 통산부장관실에 나타났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표를 내려고 했는데 밑에 있는 사람들이 사표를 찢어버렸습니다.”

임장관이 화를 버럭 냈다.

“그러면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쓰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김회장은 분명한 답변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당초 김회장은 정말 사표를 낼 생각이었으나 박제혁(朴齊赫)기아자동차 사장 등 측근들의 읍소에 밀렸다는 후문이다.

기아문제 처리가 지연된 데는 정부의 책임도 컸다.

부도유예협약 이후 강부총리는 “기아사태는 채권단과 기아와의 문제일 뿐”이라는 이른바 ‘시장경제론’을 견지했다. 강부총리는 심지어 부도유예협약을 적용하기 직전에 김회장이 아시아자동차 처분 및 기아특수강 처리방향을 제시하자 “주거래은행(제일은행)과 상의할 일이고 정부가 간여할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한 외국계 증권사 분석가는 “강부총리의 불간여 선언은 한국정부가 기아문제를 해결하리라고 믿었던 투자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작년 추석 연휴였던 9월14일부터 17일까지 정부와 채권단 및 기아 관계자들은 연휴를 즐기지 못했다. 7월15일 적용된 부도유예협약이 불과 보름 뒤면 끝나기 때문에 협약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서울 아미가호텔에서 숙식을 같이 하며 해결책을 모색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인 9월17일 임장관, 김영태(金英泰)산업은행 총재, 류시열(柳時烈)제일은행장, 이호근(李好根)제일은행 이사, 박제혁기아 사장, 송병남(宋炳南)기아경영혁신단 사장 등이 머리를 맞댔다.

정부―채권단―기아 삼자간에 최종 합의를 하는 날이었다.

회의에 참석했던 김진표(金振杓)당시 재경원 은행보험심의관의 증언.

“기아그룹 계열사 명단을 놓고 줄을 그어가면서 처리방안을 하나씩 결정했습니다. △기아자동차는 98년 말까지 채무를 유예하고 은행관리 △기아특수강은 현대 대우가 공동경영 △아시아자동차는 대우가 인수 △기산은 청산 △김회장은 사표를 제출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닷새 뒤 기아는 또 한번 약속을 뒤집었다.

9월22일 기아는 기아자동차 아시아자동차 기아특수강 기아인터트레이드 등 주력계열사들에 대한 화의신청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기아는 한쪽에서는 부도협상을 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화의신청을 준비했던 것.

기아는 왜 화의에 집착했을까. 전 기아 고위 관계자의 설명.

“화의를 하면 김선홍회장이 물러나지 않아도 됐기 때문입니다. 김회장 없는 기아는 상상하기 힘들었지요. 또 당시 정부는 삼성을 싸고도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김회장의 퇴진은 곧 삼성의 인수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정부가 ‘김회장의 자리를 보장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신뢰를 잃어버린 거지요.”

그러나 윤증현(尹增鉉)당시 재경원 금융정책실장의 설명은 다르다.

“김회장이 초기에 사표를 냈다면 퇴진시키지는 않았을 겁니다. 함부로 퇴진시킬 수도 없었지요. 그러나 국민 부담으로 경영부실을 메울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김회장이 일단 사표를 내는 모습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아측이 워낙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아까운 시간만 흘러가버린 겁니다.”

기아의 화의신청 소식이 알려지자 정부측은 펄펄 뛰었다.

먼저 기아의 배신행위를 비난하고 나섰다. 김회장을 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마침내 10월21일 청와대에서 김용태(金瑢泰)대통령비서실장 주재로 최종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는 강부총리 김인호(金仁浩)청와대경제수석 임창열장관 등 경제각료는 물론 공보수석 정책기획수석 행정수석 노동부차관 안기부차장 신한국당정책조정위원장 등 정부와 여당의 고위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자정까지 난상토론이 벌어졌다.정부쪽이 법정관리를 주장한 반면 선거를 앞둔 신한국당은 화의 수용을 주장했다. 김비서실장이 “대통령께 법정관리를 보고해서 결론을 내겠다”며 회의를 끝냈다.

10월22일 법정관리신청 방침이 발표됐다. 부도유예 이후 1백일 동안 기아측이 그토록 반대하던 것이었다.

김태정(金泰政)검찰총장이 김선홍회장의 개인비리 내사설을 슬쩍 흘리고 나섰다.

“진작 물러났어야 할 사람이 물러나지 않고 있는 것은 물러나면 안될 사연(개인비리를 지칭)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앞으로 그 사연을 좀 알아봐야겠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도 각의에서 기아사태를 처음으로 공식 언급했다.

김회장은 명운이 다한 것을 깨달은 듯 10월29일 사임했다.

기아의 고위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대통령이 일찌감치 분명한 의사를 전달했다면 김회장은 벌써 물러났을 겁니다. 우리는 대통령의 의중을 몰라 애를 태웠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홍콩의 페레그린증권이 ‘Get out of Korea, now!’(한국을 떠나라, 즉시)라는 보고서를 만들고 있을 때였다. ‘국민기업’ 기아는 이런 과정을 겪으며 ‘국민경제에 부담을 주는 기업’으로 전락해갔다.

기아사태가 1백일이 넘도록 지속된 데는 지도력 부재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전 재경원 고위 관계자의 설명.

“김대통령이 모든 문제의 근원에 서 있었습니다. 한보사태로 아들 현철(賢哲)씨가 구속된 뒤 김대통령은 자신감과 지도력을 상실했어요. 강부총리나 김인호수석이 과단성 있는 정책을 펼칠 수가 없었습니다. 기아사태 초기부터 실무자들이 부도나 법정관리를 건의했지만 번번이 묵살됐습니다.”

답답했던 재경원 관계자들이 수차례에 걸쳐 검찰과 안기부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이들의 행동도 굼뜨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아사태를 유심히 지켜본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기아와 외환위기의 원인을 이렇게 분석했다.

“한국에서 달러보다 부족한 것은 리더십이다.”〈이희성기자〉

lee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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