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28일간의 ‘괴질 지옥’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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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정유정 지음/496쪽·1만4500원·은행나무

놀랍도록 치밀한 전개, 압도적인 흡인력, 강력한 서사의 힘…. 정유정은 2011년 3월 펴낸 ‘7년의 밤’으로 한국 소설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극찬을 받았다. 현재 49쇄까지 찍으며 스테디셀러 반열에 오른 ‘7년의 밤’은 30만 부가량 팔렸다. 독자와 문단은 그의 차기작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2년 3개월 만에 돌아온 정유정(47)의 이번 신작을 읽고 나니 이런 말이 떠올랐다. 명불허전(名不虛傳). 2011년 말 초고를 완성한 뒤 무려 1년 반 가까이 글을 다듬고 고쳤던 작가는 빈틈을 찾아보기 힘든 완전체 같은 이야기를 들고 왔다. 국내 문학 시장의 불황 속에서 정유정의 등장은 축복이자 희망이다.

서울과 맞닿은 경기도 북부에 위치한 가상의 도시 ‘화양’. 인구 29만 명의 이 도시에 ‘빨간 눈’이란 전염병이 발생한다. 눈이 핏빛으로 변하는 게 특징인 이 병에 걸리면 40도가 넘는 고열과 호흡곤란, 폐출혈 증세를 보이고 며칠 내 사망에 이른다. 최초 발병된 중년 남자의 사망 이후 병은 그의 이웃, 그를 병원에 후송했던 구급대원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된다. 책 제목은 28일간의 혼돈을 가리킨다. 인수(人獸)공통전염병이라는 사실만 확인됐을 뿐 전염 방식조차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감염자와 사망자가 빠르게 증가하자 정부는 화양시를 봉쇄한다.

세기말적인 영화나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전개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디스토피아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철저히 까발린다. 폭력, 배신, 절망, 구원, 박애…. 작가는 1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술술 넘어가는 재미있는 책을 쓰고 싶다”고 밝혔는데, 책은 읽는 즐거움에 덧붙여 진한 감동까지 선사한다.
▶본보 1월 10일자 A21면 참조… “28일간의 지옥, 냄새까지 느껴졌으면…”

초반은 조금 참을성 있게 넘길 필요가 있다. 작품은 수의사 재형, 구급대원 기준, 신문기자 윤주, 간호사 수진, 공익근무요원이자 살인마인 동해, 그리고 투견이었던 링고의 눈을 통해 지옥으로 변해가는 화양을 그려내는데, 이들의 소개에 초반 100쪽가량을 할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초 발병자가 난 이후부터 이야기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그 관성을 받아 나머지 400쪽이 숨 가쁘게 넘어간다. 한국 소설 중에서 이토록 매력적인 페이지터너(page turner·책장이 술술 넘어갈 정도로 재미있는 책)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이야기 전개 방식도 흥미롭다. 재형을 비롯해 소설을 풀어가는 6개의 시선이 서로 교차되며 하나의 사건을 다각적으로 보여준다. 이를테면 링고와 기준의 격투에서 링고와 기준의 시선,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재형과 윤주의 시선이 교차되며 상황을 좀더 입체적으로 만든다. 활자화된 영상을 보는 느낌이다. 책장을 덮고 나면 불타는 도시로 변한 화양, 그 속에서 절규하는 사람들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올 여름휴가 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여행지에 무겁게 들고 간 책이 재미없을 때 화가 치민다. 이 책은 그런 우려를 씻어준다.    
    

▼ “동물이 禍를 당하면 인간도 당합니다” ▼
■ 정유정 작가 일문일답

    

2년 3개월 만에 장편소설 ‘28’을 펴낸 소설가 정유정. 가상의 도시 화양에 퍼지는 인수공통 전염병과 그로 인한 파멸과 절망을 그린 이소설은 치밀하고 탄탄한 이야기의 힘으로 독자를 압도한다. 은행나무 제공
2년 3개월 만에 장편소설 ‘28’을 펴낸 소설가 정유정. 가상의 도시 화양에 퍼지는 인수공통 전염병과 그로 인한 파멸과 절망을 그린 이소설은 치밀하고 탄탄한 이야기의 힘으로 독자를 압도한다. 은행나무 제공
―인수공통전염병을 소재로 택한 이유는….

“모든 생명은 본질적으로 귀한데 인간은 동물을 수단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요. 동물이 어떤 기여를 하는가를 기준으로 보고 기여를 하지 않으면 버리죠. 구제역 때 (동물을) 도살 처분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동물이 화를 당하면 인간도 화를 당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읽다 보니 접속사가 거의 보이지 않던데….

“한두 개 정도 넣은 것 같아요. 속도감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뺐어요.”

―6개의 시점이 이색적이다.

“일인칭이나 전지적 작가 시점을 사용하면 작가의 목소리가 드러날 것 같았죠. 도시 전체의 이야기를 다루려면 다중시점이 좋을 것 같았어요.”

―집필 중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개) 링고를 쓸 때가 힘들었어요. 하하. ‘내가 개가 돼봐야 하나’ 싶었죠. 개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작가는 ‘재미있었던 것은 안 물어보세요?’라며 이렇게 말했다. “(사이코패스인) 동해가 되어 글을 쓸 때가 가장 즐거웠어요. 하하.”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기다려 주셔서 감사하고 실망시켜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28#정유정#전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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