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규의 꿈’ 싣고… 얼음 부수며 남극바다 누빈다

  • 입력 2009년 6월 6일 02시 56분


부산 영도구 봉래동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국내 최초의 쇄빙선 아라온호에 탄 핵심 승무원들이 한국의 극지연구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익수 선장, 서호선 기관장, 김희수 전기장, 신동섭 전자장. 사진 제공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구 봉래동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국내 최초의 쇄빙선 아라온호에 탄 핵심 승무원들이 한국의 극지연구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익수 선장, 서호선 기관장, 김희수 전기장, 신동섭 전자장. 사진 제공 한진중공업
■ 12월 출항하는 국내 첫 쇄빙선 ‘아라온호’ 건조현장 가보니

실험연구실에 헬기장까지…만능기능 갖춘 바다의 슈퍼맨

선진국서 공동연구 잇단 제의, 한국 극지연구 위상 급상승

#1. 2003년 12월 7일. 전날 남극 세종과학기지에서 고무보트인 세종2호를 타고 나갔던 대원 3명과 연락이 끊겼다. 남은 5명의 대원은 수색대를 구성해 세종1호를 타고 동료들을 구조하기 위해 나섰다. 이날 오후 8시 50분경 세종1호는 “보트에 이상이 생겼다. 물에 빠졌다…”는 마지막 소식을 전한 뒤 교신이 두절됐다. 세종2호에 탄 대원들과 바다에 빠진 수색대원 중 4명은 구조됐지만 전재규 연구원(당시 27)은 결국 숨진 채 발견됐다. 남상헌 하계대장(현 한국해양연구원 부설 극지연구소 극지운영실장)은 “체격도 야리야리한 친구를 그 차가운 물에서 떠나보냈다”며 가슴을 쳤다. 대원들은 “쇄빙선 한 척만 있었어도…” 하며 통곡했다.

#2. 2009년 6월. 부산 영도구 봉래동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는 국내 최초의 쇄빙선인 아라온호가 90% 이상 건조돼 막바지 단장이 한창이었다. 쇄빙선 건조사업을 총괄 지휘하는 남 실장은 수시로 이곳을 찾아 뿌듯한 마음으로 아라온호와 만난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저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재규에게 늘 마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아라온호를 볼 때마다 너무 고맙고, 또 너무 미안할 뿐입니다.” 전 씨와 같은 보트에 탔다가 구조된 정웅식 연구원은 “고인의 희생으로 아라온호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 씨의 유해는 2007년 10월 국립대전현충원 의사상자 묘역에 안장됐다. ‘춥지 않나요? 거긴 항상 따뜻했으면 좋겠어요. 잊지 않을게요.’ 전 씨를 추모하는 홈페이지(cafe.daum.net/sejongjaegu)에는 요즘도 간간이 방문객들이 들어와 글을 남긴다. 전 씨의 죽음은 얼음을 깨고 운항할 수 있는 쇄빙선 건조 시기를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 정부는 이전부터 쇄빙선을 만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사고가 난 뒤 쇄빙선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자극받아 건조 작업에 더욱 속도를 냈다. 극지 연구의 꿈을 담아 영도조선소에서 건조되는 아라온호를 미리 살펴봤다.

○ 선체 앞부분 밑쪽에 ‘아이스 나이프’ 장착

영도조선소 독은 아라온호를 도장하고 프로펠러를 고정시키는 작업 등으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붉은색 선체에 새겨진 흰색의 ‘아라온’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바다를 뜻하는 옛 우리말 ‘아라’에 모두라는 의미의 ‘온’을 붙인 말로, 모든 바다를 누비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일반 배는 선체 앞부분 아래가 둥글지만 아라온호는 선체 앞부분 밑쪽에 얼음을 자를 수 있는 ‘아이스 나이프’가 장착돼 있다. 한진중공업 임태완 선임설계원은 “선체에 칠하는 도료도 돌덩이처럼 단단해 얼음 조각에 쉽게 긁히지 않는다”며 “섭씨 영하 30도에서 영상 50도까지 견딜 수 있어 극지와 적도를 전천후로 누빌 수 있다”고 설명했다.

후미에 프로펠러 2개가 있고 배 앞쪽에도 보조 프로펠러 2개가 장착됐다. 후미의 프로펠러는 몸체가 수평 방향으로 360도 회전해 아라온호는 전후좌우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깨진 얼음이 배에 달라붙으면 선체를 흔들어 얼음을 털어낸다. 일반 배는 얼음조각이 그대로 배에 얼어붙어 꼼짝없이 그 자리에 갇히게 된다. 아라온호는 진동이 심한 엔진이 아니라 발전기로 가동되는 전기모터로 움직여 떨림이 적고 조용해 연구를 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자동위치유지장치(DP)를 달아 해류나 바람 등에도 배가 움직이지 않고 특정 위치에 그대로 떠 있을 수 있어 해저 탐사를 하는 데도 유리하다.

각종 실험 장비가 설치된 연구실과 컨테이너를 실을 공간은 물론이고 헬리콥터장과 격납고도 갖췄다. 유리 창문 등 곳곳에 열선을 넣어 혹한에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임 설계원은 “아라온은 얼음을 깨는 것은 기본이고 25t 크레인으로 자체 하역까지 가능한 ‘슈퍼맨’ 같은 배”라고 말했다.

○ 한국 극지연구, 미운 오리새끼에서 백조로

선진국들은 극지가 각종 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된 ‘신천지’라는 점에 주목해 극지 연구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극지 연구에 쇄빙선은 필수품이지만 한국은 남의 나라 배를 빌리거나 얻어 타야 했다. 남극에 기지를 둔 20개국 가운데 쇄빙선이 없는 나라는 한국과 폴란드뿐이다.

쇄빙선을 빌리려면 하루에 8000만 원이 넘는 비용이 들고 혹한과 유빙에 견딜 수 있는 내빙선(耐氷船)을 빌리는데도 하루 4000만 원 가까운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나마 빌릴 수 있는 기간이 제한돼 가고 싶은 곳도 마음껏 다니기 어려웠다. 남극에서 연구하기에 적합한 시기는 여름인 11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로 이때는 다른 나라들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때문에 쇄빙선은 ‘귀한 몸’이 된다. 정경호 극지연구소 대륙기지사업단장은 “쇄빙선이 있는 미국은 3, 4개월을 항해하면서 연구하는 반면 우리는 길어야 한 달 반 정도 항해할 수 있어 늘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정 단장은 “오랫동안 셋방살이를 하다 마침내 내 집을 마련한 느낌”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아라온호의 탄생으로 극지 연구 분야에서 한국의 위상은 높아졌다. 벌써부터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선진국들이 공동 연구를 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극지연구소가 올해 개최하는 심포지엄에 참가하는 외국 연구원들도 크게 늘었다. 극지연구소 이지영 홍보팀장은 “심포지엄에 외국 연구원을 초청하려면 체재비 전액을 지원해야 10명 안팎이 참가했는데 올해는 주제가 쇄빙선인 점도 있겠지만 48명이나 신청했다”며 “대부분 비용을 스스로 부담하겠다고 해 달라진 위상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아라온호는 8월 중순 공식 시운전에 들어간다. 10월에는 인도 명명식을 갖고 12월 남극으로 출항할 예정이다.

부산·인천=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남의 나라 배 빌려탔던 설움 잘 알아

마음놓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 만들것”▼

■ ‘아라온호’ 운항 4인의 각오

狗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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