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잎은 왜 물에 젖지 않을까” ‘표면과학’ 수수께끼

  • 입력 2008년 8월 22일 03시 00분


기름성분이 물 밀어내고 돌기가 물방울 만들어

나미브사막 딱정벌레는 돌기가 물 모으기도

표면연구 성과 잉크젯 프린터-질병 진단용 칩 등에 널리 응용

《해마다 가을이면 농가에서는 토종꿀을 뜬다. 따뜻한 물에 꿀 한 숟가락을 타서 마시면 며칠 앓던 감기도 똑 떨어질 것 같다. 여기서 잠깐. 숟가락으로 꿀을 뜰 때 늘 불편했을 것이다. 꿀이 숟가락에 진득하니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미국 과학전문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8월호는 물을 뜨듯 깔끔하게 꿀을 덜 수 있는 ‘꿀 숟가락’을 소개했다. 꿀 숟가락의 비결은 바로 표면에 있다. 》

○ 꿀을 묻히지 않고 숟가락으로 뜨는 방법

보통 숟가락의 표면은 매끌매끌하다. 꿀을 뜨면 옆으로 퍼져 꿀과 숟가락의 접촉면이 넓어지기 때문에 서로 잘 달라붙게 된다.

1990년대 초반 독일 본대 연구팀은 꿀 숟가락 표면에 수μm(마이크로미터·1μm는 100만분의 1m) 크기의 특수 실리콘 돌기를 붙였다. 이 표면에 묻은 꿀은 퍼지지 않고 구슬 모양으로 뭉친다. 꿀과 숟가락의 접촉면이 훨씬 줄기 때문에 꿀이 달라붙지 않는다.

꿀 숟가락은 연잎을 모방한 것이다. 연잎 표면에는 기름 성분과 미세 돌기가 있는데, 돌기 위로 물방울이 구슬 모양으로 맺힌다. 연잎이 물속에서도 젖지 않는 비결이다.

꿀 숟가락의 실리콘과 연잎의 기름 성분은 물을 밀어내는 ‘발수(撥水)’ 성질을 갖는다. 여기에 미세 돌기가 합쳐지면 완벽하게 물에 젖지 않는 ‘초(超)발수’ 상태가 된다.

○ 딱정벌레, 안개 속 물을 끌어들이다

반대로 1990년대 중반 일본 도쿄대 연구팀은 이산화티타늄이라는 물질로 만들어진 표면에 물방울이 묻으면 얇게 펼쳐지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 성질은 ‘초친수(超親水)’라 불린다.

남아프리카 나미브 사막에 사는 딱정벌레는 흥미롭게도 초발수와 초친수 성질을 모두 이용해 물을 마신다. 안개가 낀 아침이면 등에 난 초친수성 돌기가 안개 속에 있는 물을 끌어 모은다. 돌기 외 부분은 초발수성이다. 이 벌레가 물구나무를 서면 돌기에 모인 물이 곧장 입으로 들어간다.

이 딱정벌레를 관찰한 과학자들은 표면 구조를 조절하면 초발수와 초친수 성질을 원하는 대로 구현해낼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미국 벨연구소 톰 크루펜킨 박사팀은 초발수성을 띠게 만든 실리콘 기판에 전기를 걸면 표면이 초친수성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포스텍 화학공학과 조길원 교수팀은 2006년 물질 표면 일부만의 특성을 변화시키는 기술을 개발했다. 아조벤젠이라는 고체의 표면은 초발수성을 띤다.

조 교수팀이 이 물질에 자외선을 쪼였더니 초발수성을 나타내는 화학구조가 구부러지면서 표면이 초친수성으로 바뀌었다. 가시광선을 쪼이면 다시 초발수성으로 돌아갔다.

조 교수팀은 용액에 담그기만 해도 표면 성질이 바뀌는 물질(폴리일렉트롤라이트)도 찾아냈다. 이를 소금물에 담그면 초친수성, 불소용액에 담그면 초발수성을 띠는 물질이 생긴다.

이 연구 내용은 조만간 국제저널 ‘어드밴스드 머티리얼스(Advanced Materials)’에 게재될 예정이다.

○ 몸속 약물 주입하는 데도 활용 가능

초발수와 초친수 성질이 자유자재로 바뀌는 물질은 어디에 활용될 수 있을까.

먼저 잉크젯 프린터에서 잉크를 뿌려주는 노즐에 쓰일 수 있다. 잉크 노즐에서 초발수 부분은 잉크를 방울방울 떨어지게 하고 초친수 부분은 잉크를 퍼지게 뿌려줄 수 있다. 노즐의 성질을 원하는 대로 변화시켜 적은 수의 노즐로도 다양한 인쇄가 가능해진다.

또 피 한 방울을 흘려 수십 가지 질병을 진단하는 바이오칩에도 응용될 수 있다. 피가 칩 위의 각 장치를 지나갈 때면 흐름을 조절할 여닫이문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문을 움직이기 위해 별도의 장치가 필요했지만, 앞으로는 초발수 때는 피의 흐름을 막고 초친수 때는 피가 흐르게 할 수 있다.

몸속에 적절하게 약물을 주입하는 데에도 활용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이 물질에 인슐린을 담아 당뇨병 환자에게 주입하면 초발수 상태에서 인슐린을 보관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 초친수 상태로 바꿔 인슐린을 혈관으로 내보낼 수 있다.

이재웅 동아사이언스 기자 ilju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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