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에서 싸우는 전사들 첨단기술로 소방관을 구하라

  • 입력 2007년 11월 23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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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들은 항상 생명의 위협에 시달린다. 최근 첨단 과학기술을 소방장비에 적용해 안전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이 탄력을 받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불과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들은 항상 생명의 위협에 시달린다. 최근 첨단 과학기술을 소방장비에 적용해 안전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이 탄력을 받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서울 종로소방서 안정렬 소방장은 2004년 12월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당시 안 소방장이 출동한 현장은 종로구 관수동의 낡은 3층짜리 세공 공장. 진화 작업에 들어가자마자 공장 내부에서 엄청나게 큰 불기둥과 맞닥뜨렸다. ‘백 드래프트(back draft)’, 즉 밀폐된 화재 현장에 갑자기 산소가 공급되면서 일어나는 강력한 폭발 현상이었다.

경력 10년의 베테랑인 그도 가까스로 3층 창문으로 몸을 던지고서야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안 소방장의 경우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다. 소방방재청 통계에 따르면 2004년부터 올해 9월까지 총 10명의 소방관이 화재 진압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최근 첨단 과학기술을 소방장비에 적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

○ 고온에서 늘어나는 용수철 이용한 방열 소방복 개발

화재 현장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불이 난 목조 건물의 내부 온도는 섭씨 1800도까지 올라간다. 화마와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의 피부 표면 온도는 40도에 육박한다. 땀을 비 오듯 흘리다 보면 정신이 몽롱해지며 기운이 빠진다. ‘열피로’ 증상이다. 소방 전문가인 홍성복 인천대 위기관리연구센터 실장은 “진화 과정에서 피로가 급격히 쌓이면 탈진할 수 있다”며 “열피로는 화염만큼이나 소방관의 생명을 위협한다”고 말했다.

연세대 의류학과 김은애 교수팀은 지난해 소방복 외피와 내피 사이에 ‘니티놀’이란 특수 합금으로 만든 용수철을 끼워 넣어 열피로를 줄인 시제품을 내놨다.

니티놀은 니켈과 티타늄의 합금. 소방관이 열기에 접근해 체온이 급격히 높아지는 50도부터 용수철이 늘어난다. 용수철이 늘어나면 소방복의 내피와 외피 사이가 부풀고, 이 사이에서 공기층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이용했다. 김 교수는 “뛰어난 천연 단열재인 공기가 소방관의 체온이 급격히 올라가는 현상을 방지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팀은 올해 초 이 제품이 외피와 내피 사이에 합성섬유를 넣은 미국산 소방복보다 땀 배출 능력이 3배 이상 높다는 실험 결과를 얻었다. 무게도 기존 소방복보다 1, 2kg 가벼운 3.6kg 정도여서 소방관의 부담을 덜어 줄 것으로 김 교수팀은 기대하고 있다.

○ 연기가 시야 가릴 땐 레이저 투시경 활약

국내 통신 벤처기업 엔터기술은 지난달 소방관의 헬멧에 부착하는 소형 카메라 개발을 마쳤다. 이 카메라는 현장의 영상을 전파(UHF)를 이용해 외부의 지휘본부에 실시간으로 전송한다. 연구팀에 따르면 화질이 일반 TV보다 4배나 선명해 화염과 연기로 가득 찬 현장의 모습을 생생히 담을 수 있다.

지휘본부는 화재 현장에 닥치는 위기를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백 드래프트 직전에는 출입문에서 연기가 내뱉듯 새어나온다. 이를 현장 소방관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면 지휘본부에서 화면을 보고 경고할 수 있다.

차봉상 엔터기술 부설연구소장은 “고가 사다리도 무용지물인 초고층 건물이 많아지면서 소방관이 현장으로 직접 뛰어들어야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현장 영상을 보며 지휘를 하면 인명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 연기 너머의 사람을 찾는 데 사용하는 첨단 레이저 투시경, 현장에 투입된 소방관의 위치를 수시로 파악할 수 있는 전자태그(RFID) 장비도 한창 개발 중이다.

○ “한국의 앞선 정보기술로 생명 구하는 그들 구해야”

하지만 일선 소방관 개인에게 부착하는 첨단 장비가 ‘그림의 떡’이 될 가능성도 있다. 노후 소방차 교체라는 ‘발등의 불’이 개인 안전장비 보급을 지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소방장비통계집에 따르면 내구연한을 넘긴 ‘고물 소방차’가 전체의 34%, 2413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에만 812억 원이 투입돼 906대가 새로 도입되거나 대체됐다.

그러나 내구연한이 지난 소방차는 매년 수백 대씩 늘어난다.

다행히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는 최근 본격화되고 있다. 소방방재청은 올해 25억 원을 시작으로 2011년까지 총 390억 원을 투입해 소방관 안전 수준을 직간접적으로 올리는 연구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개발해 놓은 장비가 현장에 확실히 보급될 수 있도록 미리 대책을 세워놓는 일이 필요하다.

홍성복 위기관리연구센터 실장은 “불 속으로 뛰어드는 소방관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며 “한국의 앞선 정보기술을 소방 장비에 적용하는 연구를 꾸준히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호 동아사이언스 기자 sunrise@donga.com

▼단말기에 건물 설계도 뜨고 GPS로 자신 위치 파악하고▼

지난해 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간한 보고서에서 한국과 과학기술 경쟁력이 비슷한 것으로 평가된 스위스는 2005년부터 화재 현장에서 과학 장비를 활용하고 있다.

헬멧 장착형 카메라는 현장 지휘에 필요한 상황을 정확하고 빠르게 전달한다. 방송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는 셈이기 때문에 소방관이 일일이 음성 보고를 하지 않아도 현장 상황을 외부에 빠르고 정확히 전달한다. 두 손이 자유로워 진화작업에 영향을 주지 않는 데다 현장에서 활동한 기록도 자세히 남는다.

가슴에 달고 있는 디지털 통신장치는 현장 대원과 지휘자, 상황실이 자유롭게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한다. 단말기 화면으로 건물 설계도를 살펴 볼 수 있는 데다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기능도 있다. 효과적으로 인명을 구하고 현장에서 길을 잃는 일을 막을 수 있는 것. 조작 단추가 커 장갑을 끼고도 쉽게 누를 수 있다.

공기통에 남은 공기의 양을 알려주는 감지기도 있다. 이를 통해 자신이 현장에서 철수해야 할 때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진화에 열중하다 공기 잔량을 확인하지 못해 일어나는 사고를 방지하는 것이다. 이런 장비가 없는 한국 소방관들은 화재 현장에 공기통을 메고 들어갈 때마다 전전긍긍해야 한다.

국내 일선 소방관들은 “현장에는 딱히 과학 장비라고 부를 만한 게 없다”고 털어 놓는다. 불과의 ‘육박전’에 의존하는 소방 시스템의 변화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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