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연구원 장순근 박사가 남극에서 보낸 편지

  • 입력 2003년 12월 14일 17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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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남극 세종과학기지에서 일어난 사고 소식을 접했을 때 온 국민은 열악한 조건의 극한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는 과학자들의 모습에 안타까워했다. 과학자들은 왜 극지로 떠나는 것일까. 1800일 이상 남극에서 지낸 경험이 있고, 현재도 현장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한국해양연구원 장순근 박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우리나라가 남극을 제대로 연구한 지 어언 17년째입니다. 육지면적의 9.2%를 차지하며 측정된 최저온도가 영하 89.6도인 남극은 지상에서 자연환경이 가장 가혹한 곳이죠.

1988년 2월에 준공된 세종기지가 남극반도의 서쪽에 있어, 남극반도의 섬들과 남빙양이 우리나라의 주요한 연구지역입니다. 잘 알다시피 바다는 무서운 곳이고 남극의 바다는 더더욱 무섭습니다. 또 세종기지가 있는 곳의 여름 날씨는 춥지는 않지만, 빠르게 변하므로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남극 바다 속은 지구 생태의 과거와 미래를 아는 데 필요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위부터 수중 30m 해저동물의 생태를 관찰하기 위한 가두리. 얼음을 깨고 바닷물을 채집하는 모습. 연안의 물질순환을 연구하기 위한 표층퇴적물 채집기.

1991년 1월 중순 기지에서 연구했던 하계대원들을 칠레기지의 부두까지 실어보내고 돌아올 때 눈이 날리는 강한 동풍을 만났던 일은, 비록 화를 입지는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등이 서늘해요. 바다가 하얀 파도로 뒤덮이고 보트가 2∼3m에 이르는 파도에 오르락내리락할 때 더 이상의 항해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죠. 바닷물에 온몸이 젖은 채, 바다로 튕겨나가지 않겠노라고 두 손으로 로프를 꼭 잡고 바닥에 주저앉는 것이 전부였어요.

또 1999년 말∼2000년 초에 세종기지에서 남서쪽으로 80km 떨어진 리빙스톤 섬에 있는 불가리아 기지 부근의 지질을 연구하던 과학자들은 찬 바닷물 속에서 고생을 많이 했죠. 장비와 시료를 배에 실으려 할 때 고무보트 2대가 모두 고장났어요.

마침 부근에 있던 스페인 연구선으로부터 고무보트를 빌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울이 워낙 거세 보트를 해안 가까이 댈 수 없었어요. 무게 200kg의 스키두(skidoo)라는 눈 위를 달리는 오토바이 같은 장비들과 주먹 크기의 지질시료들을 물속에 뛰어들어 보트까지 직접 날라야 했어요. 아무리 방한복 위에 장화가 달린 가슴까지 오는 방수복을 입어도 남극 바닷물의 냉기에 다리가 마비될 정도였죠. 다행히 다리를 쉬지 않고 움직여 마비를 막을 수 있었어요.

당시 불가리아인들은 고장 난 우리의 고무보트를 포기하라고 권했죠. 그러나 우리는 연구원의 재산인 고무보트를 포기할 수 없다고 고집해 불화가 생겼습니다. 겨우 다시 설득해 고장난 보트를 끌고 갈 수 있었어요.

남극의 많은 과학자들이 이런 험한 고생을 하지만 보람도 큽니다. 겨울 눈보라가 끝난 다음 찬란한 햇살이 비칠 때는 정말 아름다워요. 하지만 무엇보다 미지의 개척지인 남극의 비밀을 하나씩 캐나가는 데에서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끼죠.

남극은 현재의 지구환경에 많은 영향을 미치며 과거의 변화가 고스란히 기록된 역사책입니다. 게다가 남극은 방대한 생물자원과 지하자원을 갖추고 있어요. 최근 수천 년 미만의 남극환경변화에 관한 연구 재료는 바다 속에 가라앉은 퇴적물입니다. 기후와 수온에 따라 번성했던 생물의 종이 다르고 그 변화가 퇴적물 속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기 때문이죠. 그 내용을 읽으면 대기나 해류 같은 기후변화 요인을 유추할 수 있어요. 당연히 미래의 지구 기후변화를 예측하는 중요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죠.

남극을 덮는 방대한 얼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얼음에는 눈이 쌓일 당시의 공기가 보존돼 있어요. 그래서 그 공기를 연구하면 눈이 쌓일 당시의 환경을 복원할 수 있죠. 최근에는 42만년 전의 남극기후를 알아냈고 이곳으로 날아온 먼지의 발원지도 밝혔습니다.

장순근 박사

남극대륙의 얼음 밑에는 경기도만 한 호수도 있죠. 남극은 밝혀내야 할 비밀이 무한한 ‘과학실험실’인 셈이에요.

대자연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먹여 살립니다. 사람이 대자연을 두려워할 줄 알 때, 대자연은 사람의 편이죠. 그렇지 않다면 대자연은 사람을 따끔하게 가르칩니다. 남극과 남극의 바다도 마찬가지죠.

장순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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