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새로운 길찾기](上)"전자적 글쓰기도 현실이 바탕"

  • 입력 2003년 4월 3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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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 볼터 교수는 인간의 문화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디지털 기술을 인문과학에 적극 활용할 것을 주장한다. -사진제공 제이 볼터 교수
제이 볼터 교수는 인간의 문화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디지털 기술을 인문과학에 적극 활용할 것을 주장한다. -사진제공 제이 볼터 교수
《인문학의 운명에 대한 진단은 각양각색이지만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뉴미디어가 인문학의 심층 구조를 총체적으로 변형시킬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일부 인문학자들은 급변하는 문화 환경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사유하며 사태를 진단하는 시각들을 내놓고 있다. 선구적 성과를 내놓고 있는 세 학자들과의 e메일 인터뷰를 통해 인문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 본다. 총 3회 중 첫 회는 미국 조지아테크놀로지연구소에서 뉴미디어학을 담당하고 있는 제이 볼터 교수. 인터뷰는 고려대 김성도 교수(언어학)가 맡았다.편집자》

김성도=볼터 교수께선 프레드릭 제임슨의 ‘후기자본주의’라는 표현처럼 ‘후기활자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전자책이 등장했음에도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활자책과 전자책이 공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이 볼터〓중요한 것은 기존 형식의 책들이 계속해서 인쇄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활자책이 과연 중요한 텍스트들의 ‘저장소’로서 특권화된 위치를 계속해서 누릴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후기자본주의가 여전히 원기 왕성한 자본주의의 연장인 것처럼 활자화된 매체들은 후기활자시대에서도 여전히 엄청난 명예와 권위를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급속한 퇴락과 더불어 자본주의는 심각한 경쟁자를 갖고 있지 않은 반면에 활자책은 경쟁자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에 이어 등장한 다양한 영상미디어와 전자미디어입니다. 이 같은 경쟁자들은 활자책이 우리의 문화에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를 다시 규정하고 있습니다. 활자와 디지털 형식 사이의 긴장을 통해 ‘책’이라는 관념 자체가 변하고 있습니다.

김〓하이퍼텍스트는 내러티브(narrative·서사)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지만 몇몇 비평가들은 내러티브의 다중 선형성(線形性)은 이야기의 본질 또는 속성 자체를 파괴시킬 위험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볼터〓사실 하이퍼텍스트에서 흥미로운 것은 플롯의 변화가 아니라 텍스트의 짜임새, 스타일, 시점 등의 변이입니다. 이 같은 다채로운 변화는 문학적 실천에 대한 하이퍼텍스트의 큰 공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전자 픽션에서는 종래의 하이퍼텍스트와는 다른 두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체 동작시(kinetic poetry)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존 카레이와 같은 시인이 쓰고 있는 이 같은 시에서 텍스트는 계속해서 움직이며 사용자와 실시간으로 상호작용합니다. 여기서는 정태적 텍스트들 사이의 링크를 선택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하나는 멀티미디어 게임이나 시뮬레이션처럼 이야기가 사용자의 상호 경험에 대한 배경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김〓당신은 “학교는 모두 인터넷에 연결되어야 한다”며 “미국 교육의 네트워킹으로 인해 글쓰기는 하이퍼텍스트 스타일로 변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사이버스페이스에 길들여진 인간이 정상적인 감수성과 윤리를 간직할 수 있을까요?

볼터〓교육에 미친 가장 큰 파장의 원천은 월드 와이드 웹이었습니다. 웹의 엄청난 영향은 바로 그것이 ‘전 지구적(global) 하이퍼텍스트’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다양한 지역, 문화와 관련된 사이트를 방문하고 자료를 검토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환경을 갖게 됐습니다. 또한 가상공간은 사용자에게 물리적 사회적 세계로부터 사이버공간으로 탈출할 수 있는 길도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탈출은 현명한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서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 속에서도 사용자들은 물리적 사회적 세계 속에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컴퓨터는 사용자가 세계와 맺는 상호작용을 증가시키는 하나의 보조 장치로 사용될 뿐입니다.

김〓새로운 글쓰기 환경은 자아와 정신에 대해서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요? 전자적 글쓰기와 포스트모던적 자아 사이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볼터〓포스트모던 자아는 계몽주의 시대의 고정된 자율적 자아와 비교해볼 때 신축적이며 가변적입니다. 사용자들은 e메일, 채팅 등 디지털적 글쓰기의 테크놀로지들을 이용하며 자신들의 자아에 대해서 이 같은 탄력적인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물론 이 같은 자유는 그들이 문화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채팅 그룹과 e메일 등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물리적 현실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종, 젠더, 종교적 문화 등의 차원에서 규정을 받습니다.

정리=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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