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본 세상]인간과 컴퓨터의 대결

  • 입력 2002년 10월 22일 18시 45분


사람과 기계가 맞붙은 세기의 체스 대결이 무승부로 끝났다. 체스 세계 챔피언 블라디미르 크람니크와 컴퓨터 ‘딥 프리츠’가 19일 바레인에서 벌인 체스 대결이 무승부를 기록한 것. 전적은 2승2패4무.

바레인 하메드왕이 상금 100만 달러를 내건 이 대회는 5년 전 크람니크의 스승인 개리 카스파로프가 ‘딥 블루’에 패한 데 대한 설욕전이어서 관심을 모았다. 경기 초반 크람니크가 2승1무로 앞섰으나 컴퓨터가 기상천외의 수로 체스왕을 연거푸 눌러 전세를 뒤집었다. 놀라운 점은 딥 블루가 IBM이 만든 ‘항공모함급’ 컴퓨터인 반면 딥 프리츠는 ‘보트’에 불과한 컴퓨터였다는 것. 무게 1.4t의 딥 블루는 초당 2억개 연산속도를 자랑하는 슈퍼컴퓨터. 반면 딥 프리츠는 연산속도 초당 350만개의 평범한 컴퓨터에서 작동했다.

딥 프리츠가 체스 천재를 꺾은 비결은 뛰어난 프로그램, 즉 인공지능이다. 딥 프리츠는 독일 체스베이스사가 개발한 세계 최고의 상업용 체스 프로그램. CD-ROM에 담을 수 있으며 가격은 86달러다. 누구나 이 프로그램을 노트북컴퓨터에서 작동시켜 세계 최고수와 승부를 겨룰 수 있다. 그만큼 5년 전에 비해 인공지능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과 싸우느라 기진맥진한 크람니크는 “컴퓨터가 상상도 못할 수를 둬 쇼크를 받았다”고 실토했다. 컴퓨터에 밀리기 시작한 체스 프로들은 자존심은 물론 밥그릇조차 컴퓨터에 빼앗길까봐 걱정하고 있다. 요즘 체스프로대회보다 체스프로그램대회가 더 인기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개발사에서 ‘딥 프리츠’의 등장은 큰 이정표가 될 게 분명하다. 1950년대에 인공지능 개념이 나온 이후 과학자들은 궁극적인 마인드 게임의 모델로 체스 프로그램을 개발해 왔다. 덧셈 뺄셈 기계인 컴퓨터가 고도의 추론 및 학습 능력을 가진 인공지능이 될 수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곧 인간과 컴퓨터의 체스 대결이었던 셈이다.

눈부신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은 번역, 음성 인식, 얼굴 인식, 지능형 교통 수단 개발, 로봇, 범인 추적 감시 등 컴퓨터가 쓰이는 모든 분야에서 인터넷에 이은 제2의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미국에는 ‘어머니는 자식보다 늙었다’처럼 보통 사람이 아는 300만개의 법칙과 상식을 담은 사이크(Cyc)란 인공지능이 등장해 올해 국방부가 해커 탐지에 이를 쓰기로 결정했다.

과학자들은 사람 수준의 인공지능이 21세기 중반에 등장할 것으로 본다. “인공 지능 로봇이 세상을 지배할 수도 있다”는 스티븐 호킹의 경고가 현실의 문제로 등장하기 전에 이 기술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지금부터 진지하게 시작돼야 한다.

신동호기자 do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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