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상거래 "언제 걷나"…정부-기업담당자 구매 외면

  • 입력 2000년 4월 19일 19시 40분


지난달 초 S대 창업센터장으로 취임한 김모교수. 그는 창업센터에 들여놓을 노트북컴퓨터와 데스크톱컴퓨터, 프린터 등을 전자제품 역경매업체에서 구입하는 것이 훨씬 싸다는 사실을 알고 한 역경매업체와 3000만원 규모의 가계약을 했다.

▼담당자-유통상 기피풍조▼

그러나 대학 구매부서장은 대금지급을 요청하기 위해 찾아간 김교수에게 “구매는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상관하지 말라”며 일축했다. 일주일 뒤 구매부서는 김교수가 역경매업체에서 알아본 가격보다 10% 이상 비싼 가격으로 물건을 들여왔다. 그는 구매부서에서 리베이트를 받고 비싼 가격으로 물건을 구입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전자제품 역경매업체인 예쓰월드는 이달 초 한 중소기업 직원으로부터 컴퓨터와 프린터 수십대를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전달받았다. 그러나 그 직원은 며칠 뒤 다시 찾아와 “미안하지만 구매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예쓰월드는 그 기업 구매부장이 “전자제품 등 특정 제품 구매는 사장이 지정하는 업체에서 구입해야 한다”며 거래처를 바꾸는 데 반대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사장이 뒷돈을 받거나 비자금 조성을 위해 믿을 수 있는 특정업체로부터 회사비품을 구매한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

디지털 경제의 핵심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기업간 전자상거래(B2B). 그러나 구매과정에서 수반되는 뒷거래, 탈세, 무자료거래 등 한국 특유의 부패관행이 전자상거래 확대의 발목을 잡고 있다.

▼정부 육성안 안먹혀▼

정부부처나 기업의 구매담당자 및 유통상들이 전자상거래를 꺼리는 것은 전자상거래를 도입할 경우 거래가 투명해지고 거래과정이 그대로 노출돼 뒷거래나 탈세가 어려워지기 때문.

전자상거래업계는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정부부처 및 공기업의 전자상거래를 통한 물품구입 확대안’에 대해 냉소적이다. 정부발표만 믿고 공기업이나 조달청을 찾아갔다가 박대만 받고 돌아온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서울의 한 관계자는 3월 중순 전자상거래 입찰과정의 참여방법을 알아보기 위해 대전의 조달청을 찾아갔다가 시간만 허비했다. “전자상거래 담당자를 찾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어디로 가보라’는 말만 되풀이하더군요. 물어 물어 찾아갔더니 실은 제일 처음 만난 사무관이 담당자더군요. 전자상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알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정부도 이런 현실을 알고 있다. 산업자원부 관계자는 “전자상거래가 구매부서의 기득권을 해칠 것이 뻔한데 구매담당 직원들이 전자상거래 도입에 앞장서는 것은 무리”라며 “기획예산처가 전자상거래 실적이 부진한 공기업에 불이익을 주기 위한 작업을 추진중”이라고 말했다.

▼전자제품-의료분야 심해▼

무자료 거래와 탈세가 관행화된 전자제품이나 의약품 의료기기 주류도 전자상거래에 소극적. 용산전자상가 관계자는 “전자제품 유통업체 1만4000개 중 회사의 직판 대리점 외에는 매출액의 10%도 신고하지 않고 무자료거래, 덤핑, 탈세가 일반화돼있는데 누가 전자상거래를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의료기기 및 제약품 B2B사이트를 운영하는 SK상사 헬스케어팀도 의약품과 의료기기 무자료 거래와 탈세관행을 어떻게 극복해나갈지 고민중이다.

임영학 삼성물산 인터넷사업팀장은 “전자상거래는 구매담당자에게 맡겨서는 기득권과 상충돼 활성화가 어렵다”며 “회사의 최고경영진이 직접 챙겨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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