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소프트웨어산업]「한국의 빌게이츠」꿈도 못꾼다

  • 입력 1998년 9월 8일 19시 57분


《국내 소프트웨어산업이 벼랑 끝에 몰려 있다. 불법복제와 IMF 경제위기로 영세 소프트웨어업체의 부도가 속출하면서 산업 자체가 붕괴 위기에 놓였다. 동아일보사가 소프트웨어벤처협의회와 공동으로 벌이고 있는 ‘우리 소프트웨어 살리기 운동’도 위기의 소프트웨어산업을 다시 일으키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소프트웨어 산업 현장을 긴급 진단, 육성방안과 함께 돌파구를 모색한다.》

“빌 게이츠를 꿈꾸기에는 환경이 너무 나쁩니다. 꿈은 고사하고 당장 생존 자체가 절박한 게 현실입니다.”

2백여 정보통신업체가 밀집해 있는 서울 강남구 포이동 일대. 일명 ‘한국의 실리콘밸리’.

게임소프트웨어를 만드는 T사의 L사장은 한숨부터 내쉰다. 그는 “매월 돌아오는 어음 막는 일도 이제 지쳤다”며 사업포기를 심각하게 생각중이다.

지난해부터 이 지역을 떠난 업체는 줄잡아 20여곳. 사업을 포기한 업체도 10여군데는 넘는다고 입주업체들은 말한다.

포이동에 입주한 업체뿐만 아니라 현재 국내 소프트웨어업계는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다. 소프트웨어산업협회에 따르면 IMF 체제이후 도산한 소프트웨어업체의 수가 종전의 2배를 훨씬 넘는다.

시장의 성장률도 2년전의 40%에서 크게 떨어져 현재는 고작 4%선에 머물고 있다. 매출액만 놓고 봤을 때 96년까지 43%를 웃돌던 신장률이 지난해 26%, 올해 14%로 급격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IMF 직격탄을 가장 심하게 맞은 업종은 PC게임업체들. 한국PC게임개발자연합(KOGA)의 최권영회장은 “68개 회원사 중 30여 업체가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며 이중 절반인 15개 정도가 부도를 냈거나 사업을 정리한 것으로 추정했다.

최회장은 “기껏 해봐야 연 4백억원 안팎의 게임시장에 수많은 영세기업들이 난립, 제살 뜯어먹기식 경쟁을 하다보니 유통업체 한 곳이 부도를 내면 개발업체들이 줄줄이 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 최근 중소유통사인 하이콤이 부도를 내면서 개발비도 못건진 개발사들이 잇따라 부도를 냈다.

‘포이동 가족’의 말을 빌리면 정부의 지원자금은 ‘그림의 떡’. 대출 담보를 요구하기 때문에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자금이 달려 후속제품을 출시하지 못해 문을 닫는 경우도 부지기수. 경쟁력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도 빚에 쪼들려 도산하기도 한다.

문서출판프로그램(DTP)을 만드는 K사는 프로그램 3,4종을 동시에 내놓아 연 30억원에 달하는 매출을 기록하면서 급성장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끌어들인 부채를 갚지 못해 이 회사의 대표 C씨는 개인빚으로 1억5천만원을 끌어안고 회사를 넘겨야 했다.

요즘엔 자금확보가 어려운 점을 노린 사기까지 등장해 개발업자들을 울리고 있다.

92년 최초로 윈도환경에 적합한 워드프로세서 ‘지필묵’을 만들었던 창인시스템의 K씨. 그는 “94년 스포츠게임 ‘펑키볼’로 게임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출판사와 유통사에 잇따라 사기를 당하면서 96년 12월 3억5천만원의 부채를 고스란히 떠안고 회사문을 닫아야 했다”고 말했다. K씨는 현재 P사를 새로 차려 통신프로그램시장에 도전하고 있다.

소위 ‘잘나간다’는 업체들도 사정은 마찬가지. 지난해 대농에 60% 지분을 넘기고 계열사로 편입됐던 한메소프트는 대농이 부도를 내자 하루 아침에 ‘침몰’했다. 1백30명을 넘던 직원도 10여명만 남았다. 이창원사장은 게임과 인터넷사업을 정리하고 교육용소프트웨어‘한메디지탈대백과사전’으로 종목을 바꿔 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무분별한 사업확장으로 위기에 몰린 대표적인 기업은 한글과컴퓨터. 최근 극적으로 회생의 계기를 잡았지만 한때 소프트웨어업계에서 유일하게 수백억원대 매출을 올리며 ‘한국 소프트웨어업계의 자존심’이라 불린 한글과컴퓨터의 쇠퇴과정을 바라보면서 업계에서는 또다른 걱정을 하고 있다.

“이찬진사장의 몰락은 아이디어와 기술 하나로 벤처기업을 일으켜 보려는 수많은 꿈나무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머리좋고 패기 만만한 젊은이들이 더이상 소프트웨어산업에 뛰어들지 않는다면 한국경제는 앞으로 희망이 없습니다.”

〈김상훈기자〉core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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