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통신 집체詩]화면서 머리 맞대고 「공동창작」

  • 입력 1997년 6월 25일 07시 50분


집체창작(集體創作). 여러 작가가 머리와 감성을 맞대어 공동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글쓰기 방식. 80년대, 각 대학의 「운동권 문학서클」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적이 있다. 문학을 운동의 수단으로 삼으려던 청년들의 집념도 시대 분위기가 바뀌면서 시들해졌고…. 이제 90년대, 색다른 장르 실험은 첨단 사이버 공간에서 부활의 노래를 부른다. 김소연(30) 조수진(28) 고나리씨(27). 젊은 여류시인 3인방은 PC통신 대화방에 둥지를 틀고 상징주의 향내가 물씬 나는 두편의 집체시를 펼쳐 보인다. 4월초 어느날 밤, bluebook(김소연) ORPHEE(조수진) rulrara(고나리)가 컴퓨터 화면에 떴다. 각자의 개성과 세계관, 아이디어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멋진 시를 쓰겠다는 의욕을 품고. 잘해보자는 다짐, 그럴듯한 구절을 짜내기 위한 긴장, 표현이 너무 느슨하다는 반박, 내 것이 채택되지 않을 때의 섭섭함…. 당시 대화록 한토막. (전략) 김소연:밥을 먹는다. 조수진:파랗게 날뛰는 밥을 삼킨다. 김소연:(멋진 발전이다) 조수진:(혹은 「먹는다」로 똑같이) 김소연:「먹는다」가 낫겠어요. 고나리:저도. 조수진:파랗게 날뛰는 밥을 먹는다. 조수진:밥은 그릇에서 쫓겨나 공간으로 변한다. 고나리:꿈에서 쫓겨난 밥을 먹는다. (후략) 2시간 남짓의 산고(産苦) 끝에 사이버 집체시 「남의 밥」이 나왔다. 「밥을 먹는다/파랗게 날뛰는 밥을 먹는다/꿈에서 쫓겨난 밥을 먹는다/피곤한 꿈은 입을 다물고 있었으므로/…」 이들이 뜻을 합한 동기는 단순하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친한 친구와 수다를 떨듯 아무 부담없이, 느끼는 대로 시를 써보고 싶었거든요』 맨 처음 이 모임을 기획한 김씨는 『사이버 공간의 글쓰기를 이론이 아닌, 현실에서 살아 숨쉬는 문학으로 자리매김하려 했다』며 『「놀이로서의 창작」이 가능한 것인지를 확인한 게 가장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공동작업은 80년대식 집체시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과거의 집체창작은 일정한 방향을 정해 두고 글 내용을 그 틀안에 짜맞추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우리는 채팅의 메커니즘을 빌려 「글을 가지고 노는」 과정에 충실하려 하지요』 『「본질」에 도달하고픈 원초적 갈망을 담았다』(조수진) 『「여성성(女性性)」에 대한 무의식적 노출행위』(김소연) 이들이 PC통신에서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지, 시작(詩作)의 궤적은 최근 발매된 사이버문학 계간지 「버전업」 여름호에 실려 있다. 〈박원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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