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42>봄의 멸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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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멸
―최영철(1956∼ )

추어탕이 탁자 위에 막 놓일 즈음이었다
끓는 냄새가 피워 올린 안개에 눈물이 찔끔 나려는 낮
유선방송에서 내보낸 때 지난 뉴스의 낭랑한 음성이
박노식의 죽음을 전했다 나도 한때는 팬이었지만
애도할 마음이 없는 오후를 향해
아나운서는 조금 덜 낭랑하게 뭐라 부언하고
그럴수록 추어탕에는 마늘 고추 다대기를
독하게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바글거리는 미꾸라지들의 남루한 주검
이 봄 얼마나 많은 날것이 끓는 냄비 속에서 요동쳤을까
견뎌 보려고 형체도 없이 풀어진 미꾸라지처럼
고랑고랑한 인생들이 맥을 놓고 하나둘 갔을 것이니
별일 아닌 것이다
일주일 사이 두 명의 주검을 보내며
뜨지 않으려고 버티는 생애를 운구하느라
끙끙대며 식은땀을 너무 흘렸다
무적의 일당백 박노식의 의리로도
끝내 무찌를 수 없는 만유인력의 봄
깊은 나락 끝 벌리고 선 남발한 가랑이
속으로 속으로 줄지어 빨려들어 가는
이 무한 행진,
숟가락을 놓고
식어가는 탕 위에 산초가루를 더 뿌렸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숱한 한국 액션영화의 주인공으로 한 시절을 풍미했던 영화배우 박노식. 1995년 4월 3일에 세상을 뜨셨다. ‘마도로스 박’ ‘상하이 박’ ‘돌아온 용팔이’…. 추어탕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화자는 박노식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한때 팬이었지만’ 그 죽음이 덤덤한 화자다. 가까운 사람을 보낸 게 일주일 사이 두 차례인 것이다.

뉴스가 전하는 먼 죽음을 ‘별일 아닌 것’이라고 했지만, ‘마늘 고추 다대기를 독하게’ 넣고도 그 뉴스가 상기시킨 죽음들이, 주검의 비린내가 진동한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에 숨을 놓는 것들이라니 잔혹하고 무상하다. 죽음의 ‘가랑이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무한행진’을 화자는 무기력하게 되새긴다. ‘이 봄 얼마나 많은 날것들이 (죽음으로) 끓는 냄비 속에서 요동쳤을’ 것인가.

두 사람 다 평탄한 삶을 살다 간 게 아닌 듯하다. ‘고랑고랑한 인생들이 맥을 놓는’ 봄, 살겠다고 ‘바글거리는 미꾸라지들이 형체 없이 풀어진’ 봄. 아, 이 생명의 비린내, 죽음의 비린내! 추어탕을 휘휘 젓기만 하던 숟가락을 놓고 화자는 ‘식어가는 탕 위에 산초가루를 더 뿌린다’. ‘뜨지 않으려고 버티는 생애를 운구’하는 화자의 심정이 착잡하게 펼쳐진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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