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유혹의 진화, 홈쇼핑 20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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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8월 1일 하이쇼핑(현 GS샵)의 첫 방송 모습(왼쪽)과 쇼핑호스트가 요리를 하면서 주방용품을 판매하는 홈&쇼핑의 최근 방송 장면(오른쪽). 개국 초기 정보전달 중심이었던 TV 홈쇼핑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형태로 진화했다. GS샵·홈&쇼핑 제공
1995년 8월 1일 하이쇼핑(현 GS샵)의 첫 방송 모습(왼쪽)과 쇼핑호스트가 요리를 하면서 주방용품을 판매하는 홈&쇼핑의 최근 방송 장면(오른쪽). 개국 초기 정보전달 중심이었던 TV 홈쇼핑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형태로 진화했다. GS샵·홈&쇼핑 제공
《 “리모컨 하나면 끝. 서부의 총잡이가 된 기분으로 집에서 써 보세요!”

스튜디오 안은 단출했다. 눈에 띄는 것은 쇼핑호스트와 검은색 리모컨뿐. 이날의 주인공은 TV와 CD플레이어 등 여러 가전기기를 모두 제어할 수 있다는 ‘만능 리모컨’이었다. 정가 4만1600원에서 3만5360원으로 15% 할인해준다는 문구가 방송 화면을 가득 채웠다.

1995년 8월 1일, 하이쇼핑(현재의 GS샵)의 국내 첫 홈쇼핑 방송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기대는 높았지만 첫 방송의 주문량은 10개가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 ‘의무적으로’ 방송을 지켜보던 사내 직원들이 호기심에서 산 것이 대부분이었다.

같은 시간 홈쇼핑텔레비전(HSTV·지금의 CJ오쇼핑)은 7만8000원짜리 뻐꾸기시계 판매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역시 판매된 시계 7개 중 4개는 직원들이 주문했다. 두 회사 모두 ‘사내 반응’만 뜨거웠다.

한국 TV홈쇼핑의 시작은 이렇게 미미했다. 백화점이나 동네 슈퍼에서 물건을 직접 만져보고 요모조모 따져본 후 사는 것에 익숙한 소비자들은 “어떻게 TV로 쇼핑을 하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할 수 없는 방송’이던 TV홈쇼핑은 이제 백화점, 대형마트와 함께 주요 유통채널의 하나가 됐다. 지난해 기준으로 국내 TV홈쇼핑 시장 규모는 약 9조 원에 이른다. 10분에 1번꼴로 울리던 주문전화는 이제 ‘1분에 1000콜’이란 얘기가 나올 정도다.

올해는 한국에서 TV홈쇼핑이 생겨난 지 햇수로 20년째다. 한국의 TV홈쇼핑은 소매업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매출액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 있다. 》  
▼ 첫 상품 뻐꾸기시계, 주문 7건중 4건이 홈쇼핑 직원 ▼
값 싸서… 잠이 안와서 TV보다… 홈쇼핑 연간 이용자 1600만명
1995년 34억→작년 8조7800억… 매출규모 2582배 폭풍 성장


‘예능 쇼’같은 쇼핑 프로그램

“어제도 ‘도깨비 방망이(식재료 분쇄기)’ 하나 샀어요. 밤에 잠이 안 와서 TV를 보는데 글쎄 그게 나오더라고요.”

홈쇼핑 방송 개국 때부터 ‘20년 단골’인 강명자 씨(77)는 여전히 TV홈쇼핑 마니아다. 고등학교 가정교사이던 강 씨는 학생들에게 TV홈쇼핑과 백화점 물건 값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려주기 위해 TV홈쇼핑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유명 브랜드 머플러 가격이 백화점보다 훨씬 싼 것을 발견한 후 1주일에 한 번꼴로 의류와 주방용품 등을 사기 시작했다.

강 씨는 “품질이 좋은 데다 가격도 싸고 반품도 쉽고 편리한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며 “TV홈쇼핑을 이용한 뒤론 백화점에서는 ‘아이쇼핑’만 한다”고 했다. 실제로 초창기 홈쇼핑은 언제 어디서나 쇼핑이 가능한 편리함과 유통단계 축소로 저렴해진 가격, 손쉬운 환불 등의 강점을 내세워 빠르게 고객을 확보해 나갔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발간한 ‘2014 유통산업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TV홈쇼핑 시장 규모는 8조7800억 원. 이는 1995년 TV홈쇼핑 출범 첫해 매출(34억 원)의 2582배다. 백서는 올해 시장 규모가 지난해보다 9% 늘어난 9조5300억 원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업계에서는 현재 국내 TV홈쇼핑 이용자가 1500만∼16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의 TV홈쇼핑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비약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전문가와 유통업계는 유행이라면 꼭 따라해야 하고, 무엇이든 당장 해결하고 싶어 하는 한국인 특유의 ‘빨리 빨리’ 성향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다. 맞벌이 부부나 1인 가구 등 백화점, 대형마트의 영업시간에 쇼핑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늘어난 것도 TV홈쇼핑의 이용률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전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택배 시스템과 지상파 채널 사이에 홈쇼핑 채널을 하나씩 끼워 넣는 케이블TV의 편성도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의 TV홈쇼핑은 다채로운 볼거리와 박진감 넘치는 진행으로도 유명하다. 홈쇼핑만 보고 있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을 정도다. 윤선미 GS샵 PD팀장은 “방송 화면을 상품 정보로만 채우거나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 보여주는 해외 TV홈쇼핑과 달리 우리나라 홈쇼핑 프로그램은 한 편의 쇼를 보듯 화려하고 감각적”이라며 “멋진 모델을 기용하거나 연예인을 출연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방청객에게 즉석에서 상품을 써보게 하는 등 홈쇼핑 프로그램이 예능 프로그램처럼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독특함은 해외에서 TV홈쇼핑을 ‘한국형’과 ‘미국형’으로 나눈다는 얘기가 나오게 할 정도다.

출범 당시 2곳에 불과했던 TV홈쇼핑 업체는 6개로 늘었다. 2001년 가을 농수산홈쇼핑(현 NS홈쇼핑)과 우리홈쇼핑(현 롯데홈쇼핑), 현대홈쇼핑이 추가로 개국했고 2012년에는 중소기업 제품 전문 판매채널을 표방한 홈&쇼핑이 출범했다.

이와 관련해 유통업계의 강자인 롯데백화점과 현대백화점이 홈쇼핑 산업에 진출한 것이 업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는 평가다. 업계 관계자는 “TV홈쇼핑에서 백화점 상품을 팔기 시작하면서 ‘홈쇼핑은 싼 물건만 판다’란 고정관념이 깨졌고, 고가(高價) 제품들이 서서히 스튜디오에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뻐꾸기시계에서 패션·란제리로

24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S1관. 불이 켜지자 모델들이 음악에 맞춰 패션쇼 런웨이를 걸었다. 이날 패션쇼에서는 손정완, 김석원, 김서룡, 한상혁, 박성철 등 국내 대표 디자이너 10명이 함께 무대를 꾸몄다.

이런 정상급 디자이너들을 한 무대에 모으는 것은 꽤 어렵다. 놀랍게도 이들을 불러 모은 곳은 홈쇼핑 채널을 운영하는 GS샵이었다. 이날 패션쇼에 오른 60가지의 의상은 조만간 TV홈쇼핑에서 판매될 예정인 제품들이었다. GS샵은 지난달에는 미국 뉴욕에서 란제리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이튿날인 25일에는 CJ오쇼핑이 패션쇼를 열었다. 이 행사에서는 계한희, 양유나, 이정선, 장민영 등 최근 국내외에서 주목 받는 신진 디자이너 4명이 함께 무대를 꾸몄다.

이런 패션쇼는 현재 국내 패션업계에서 홈쇼핑 업체들이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다. 최근 TV홈쇼핑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은 의류와 란제리 등 패션 아이템이다. CJ오쇼핑에서 2009년 36%를 차지하던 패션상품의 판매비중은 지난해 51.6%까지 올랐다. 이는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의 패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TV홈쇼핑 히트상품의 변천사는 우리 사회의 변화를 한눈에 보여준다. 동아일보가 6개 TV홈쇼핑 업체에 시기별 히트상품 목록을 의뢰해 분석한 결과, TV홈쇼핑 초창기(1995∼1997년)에는 시중에서 쉽게 살 수 없는 아이디어 제품들이 베스트셀러였다. 제품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도깨비 방망이’와 ‘원적외선 오븐기’ ‘세라콜 숯불구이기’가 대표적이었다.

2000년대 중후반(2005∼2008년)에는 삶의 질을 중시하는 참살이(웰빙) 트렌드가 이어지면서 녹즙기와 스팀청소기, 극세사 침구 등이 히트상품으로 떠올랐다. 한경희 스팀청소기는 2006년 25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며 시장점유율이 70%에 이르기도 했다.

2010년을 전후해서는 연예인이나 유명인을 앞세워 뷰티상품을 판매하는 이른바 ‘스타 마케팅’이 주류를 이뤘다. 현대홈쇼핑은 하유미를 앞세운 ‘셀더마 마스크팩’을 2012년 한 해 동안 53만6000개나 팔았다. 연예인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유명한 조성아 씨와 애경산업이 공동 개발한 색조 화장품 브랜드 ‘조성아 루나’는 GS샵에서 2008, 2009년 2년 연속 히트상품 1위에 올랐다.  
▼ “싸구려는 잊어라”… 유명 디자이너 10명 한무대 세워 ▼
예능 프로그램 같은 볼거리… ‘한국형 홈쇼핑’ 외국서도 유명
백화점도 뛰어들어 치열한 경쟁… 모바일-해외시장으로 활로 모색


25일 서울 중구 을지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CJ오쇼핑 주최로 열린 패션쇼 현장(왼쪽 사진)과 28일 오전 방영된 현대홈쇼핑의 한방화장품 판매 방송. CJ오쇼핑 제공·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25일 서울 중구 을지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CJ오쇼핑 주최로 열린 패션쇼 현장(왼쪽 사진)과 28일 오전 방영된 현대홈쇼핑의 한방화장품 판매 방송. CJ오쇼핑 제공·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최근에는 TV홈쇼핑 업체들이 유명 디자이너들과 함께 만든 자체상표(PB) 의류들이 주력상품이 되고 있다.

한편 업계에서는 장기적인 소비불황이 조금씩 판매 아이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한다. 미용실 대신 집에서 염색 등 모발관리를 하게 해주는 ‘셀프 미용용품’이나 안마의자 같은 고가의 제품을 빌려주는 렌털 서비스의 인기가 그 증거다. 보청기 등 고령화 시대를 겨냥한 제품과 1인 가구를 겨냥한 소포장 식품의 인기는 한국 사회 인구구조의 변화를 읽을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출범 이후 20년 동안 질주만 하던 TV홈쇼핑 업계는 최근 들어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다. 산업 자체가 ‘성숙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2009년 20%였던 시장 성장률은 지난해 11%, 올해는 한 자릿수인 9%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급격하게 성장한 소셜커머스 등 온라인 쇼핑몰과의 경쟁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이와 관련해 TV홈쇼핑 업체들은 앞다퉈 모바일 부문을 강화하고 있다. GS홈쇼핑 관계자는 “모바일쇼핑과 TV홈쇼핑은 업체가 경쟁력 있는 상품을 선정해 고객에게 제안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며 “의외로 ‘궁합’이 잘 맞아 매출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시장 진출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지고 있다. 주요 홈쇼핑 업체들은 중국, 일본, 대만, 태국, 베트남 등 아시아권은 물론이고 미국과 터키까지 공략 중이다. 전문가들은 한국형 홈쇼핑이 일종의 ‘문화상품’ 역할을 함으로써 유통 한류를 일으킬 것으로 기대하기도 한다.

여준상 동국대 교수(경영학)는 “TV홈쇼핑은 유통 채널 사이의 경쟁을 촉진해 ‘품질을 높이면서 가격은 내리는’ 역할을 했고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중소기업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왔다”며 “앞으로는 시간한정, 수량한정 같은 표현으로 충동구매를 유도하는 데서 벗어나 좀 더 선진화된 마케팅 기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화려한 20년을 달려오며 한국인의 일상에 깊숙이 파고든 TV홈쇼핑. 쇼핑 중독자를 양산한다는 비판론과 합리적인 소비생활의 동반자라는 긍정론 사이에서 새로운 갈림길에 서 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홈쇼핑#쇼핑호스트#쇼핑#쇼핑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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