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쪽방촌 유배 리어왕, 막장현실 통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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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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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비틀고 논평하는 브레히트적 형식 전개
‘민초의 비극’ 본 몰락 군주 ‘허공’ 부르며 전사로 거듭나

연극 ‘리어외전’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을 현대적이면서 한국적인 마당극처럼 풀어낸다. 리어왕(이승철·왼쪽에서 세 번째)은 재산을 분배할 때 막내딸 코딜리어(이경미)에게는 아비에 대한 사랑을 말로 표현할 의무를 면제해줘 원작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 하지만 ‘내 인생은 나의 것’을 주장하는 코딜리어는 결국 늙은 아비의 속을 뒤집어 놓고 만다. LG아트센터 제공
연극 ‘리어외전’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을 현대적이면서 한국적인 마당극처럼 풀어낸다. 리어왕(이승철·왼쪽에서 세 번째)은 재산을 분배할 때 막내딸 코딜리어(이경미)에게는 아비에 대한 사랑을 말로 표현할 의무를 면제해줘 원작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 하지만 ‘내 인생은 나의 것’을 주장하는 코딜리어는 결국 늙은 아비의 속을 뒤집어 놓고 만다. LG아트센터 제공
만일 당신이 리어왕을 연극으로 본다면 가장 기대하는 장면이 무엇인가. 천둥번개와 폭풍우 몰아치는 광야에서 인생의 회한을 털어놓는 늙은 왕의 광기어린 독백? ‘리어외전’의 주인공 리어 역을 맡은 노배우 이승철 씨의 속내도 비슷했을까. 공연 도중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다음과 같은 대사를 치며 관객의 기대감을 높인다.

“아 클래시컬한 맛도 없는, 나는 통속극의 리어구나. 저 딸년들에게 다 버림받고 광야로만 얼른 나가보자. 그 장면만 나온다면 여기서 못 다한 이야기를 기필코 장대한 독백으로 쳐 대리라.”

하지만 믿었던 딸들에게 처절히 배신당하고 드디어 폭풍우가 아니라 눈보라 치는 광야로 쫓겨난 리어는 기다렸다는 듯이 목청까지 가다듬으며 독백의 첫 문장을 시작한다. “불어라 바람아. 나의 뺨을 때려다오.”

바로 그 순간 둘째사위의 밀명을 받은 오스왈드(김영노)가 바로 들이닥쳐 리어의 뺨을 냅다 후려친다. 그리고 실신시킨 리어를 유기노인수용소에 처박아 넣는다. 그 유명한 리어의 독백은 이걸로 끝, 종료, 디 엔드.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고선웅이 쓰고 연출한 ‘리어외전’은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변죽을 울린다. 배우들은 무대 좌우에 설치된 대기석에서 앉아 있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즉석에서 분장을 마치고 가운데 장방형 무대에 올라 연기를 펼치는데 이때 끊임없이 원작과 자신이 맡은 배역에 대한 논평을 늘어놓는다. 단역을 맡은 배우는 자기 대사가 적다고 투덜대고, 악역을 맡은 배우는 “다시 태어나면 다신 이런 배역 맡나봐라”라고 악담을 토해낸다.

심지어 리어는 딸들에게 아비에 대한 사랑을 말로 표현하라는 숙제를 막내딸 코딜리어(이경미)에겐 면제시켜 주기까지 한다. “저는 왜 말을 안 시키세요”라고 묻는 코딜리어에게 리어는 이렇게 답한다. “네가 제대로 나한테 말을 안 하면 나는 옛날 리어왕으로 염병하면서 악 쓰고 살다가 너도 뒤지고 나도 뒤지니까. 흐름을 바꿔보자고 이러는 거 아니냐. 뭔 말인지 몰라? 너 백치냐?” 작품 도처에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몰입하지 마세요”로 요약되는 브레히트적 부비트랩이 깔려 있다. 하지만 원작을 비트는 것만으로 2시간 50분(중간휴식 20분)의 공연시간을 채울 수는 없는 법. 원작을 비트는 잽 위주의 1막이 다소 지루했다면 한국적 현실을 강타하는 스트레이트가 연달아 꽂히는 2막이 훨씬 흥미로웠다. 원작과 달리 유기노인수용소로 흘러들어간 리어는 고대 영국의 전설을 지극히 현대적이고 한국적 현실로 확 바꿔놓는다.

한때 최고 권력자였던 리어는 거기서 쪽방에서 생활하며 인형눈깔 다는 일을 하는 밑바닥 인생의 노인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렇게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죽은 시체를 리어카에 싣고 가 매장하는 일을 한다. 그들은 부양의무를 팽개친 자식들의 외면을 받고 쪽방촌에 살며 인형 눈깔 다는 단순노동으로 입에 풀칠하고 살아가다 홀로 쓸쓸히 숨을 거두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수많은 한국의 노인들이다. 바로 한국 복지제도의 밖에서 ‘벌거벗은 삶’을 사는 호모 사케르다.

리어와 쪽방촌 노인들의 만남은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최고주권자와 그 주권자의 대척점에 선 호모 사케르의 극적인 조우다. 개별자의 비극이 보편자의 비극으로 전환하는 순간이다. 리어는 거기서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이야말로 자기 손톱 밑 가시만 아픈 줄만 알았지 국민의 염통에 쉬스는 줄 몰랐던 못난 지도자였음을.

리어는 그 순간 거창한 독백을 포기한 채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른다. “사랑했던 마음도/미워했던 마음도/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슬픈 옛 이야기….” 조용필의 ‘허공’이다. 그리고 자신의 비극을 슬픈 옛 이야기로 돌리기 위해 리어카를 놓고 총을 잡는다. 스스로 초래한 비극을 스스로 마무리하기 위해.

연극은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리어 읽기’다. ‘리어외전’은 그렇게 2008년 발표된 극단 목화의 한국적 ‘리어왕’과 올해 내한 공연한 독일 극단 쉬쉬팝의 현대적 리어읽기로서 ‘유서’가 만나는 지점에서 웃음기 가득한 반가사유상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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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까지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 3만∼7만원. 02-2005-0114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리어외전#고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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