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의 ‘직필직론’]<6>대선 보도, 평등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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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대통령 선거 첫 TV토론이 끝나자 언론은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에 대한 보도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언론의 높은 관심은 토론에서 보인 이 후보의 문제 있는 태도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토론이 아니더라도 신문과 방송은 지지율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 후보의 선거운동에 관해서 적지 않은 양의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지지율 40%대 후보들 사이에 1% 후보를 끼워 보도하는 한국 언론의 선거 보도 관행은 미국 언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美언론, 80여명 군소후보 보도안해

미국 대선에 웬만큼 관심 있는 한국 사람들도 민주당 버락 오바마 후보와 공화당 밋 롬니 후보만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한 후보는 두 사람 이외에 19개 정당과 무소속 등 80여 명. 그야말로 비 온 뒤 돋아난 죽순처럼 많은 후보가 출마했다. 직업도 가수에서 거리 공연인까지 다양했다.

미국 대선에서 후보가 오바마와 롬니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은 언론보도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언론은 유력 후보 두 사람만 집중 보도했을 뿐 다른 후보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철저히 무시했다. 후보에 등록한 80여 명 가운데에는 전국 여론조사에서 1%에서 5∼6%까지 기록한 후보도 여럿 있었으나 이들에 관해서 ‘보도 관제’를 한다 싶을 정도로 냉담했다.

언론뿐 아니다. 여론조사 회사인 갤럽은 대선을 4개월 앞두고서야 처음으로 군소 정당 후보 3명을 전국 조사에 포함시켰다. 이 조사에서 자유당 후보인 게리 존슨 전 뉴멕시코 주지사는 3%의 지지도를 보였다. 존슨 후보는 다른 두 여론조사에서는 각각 5%와 6%의 지지를 얻었다. 만만치 않은 인기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비슷한 시기에 전국 조사를 실시한 18개 회사 가운데 3개만이 존슨을 조사 대상에 포함시켰을 뿐이다.

표의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 조사 대상 후보의 범위를 최대한 줄였다는 게 여론조사 회사들의 설명이다. 한국의 3당 후보와 비교하면 훨씬 높은 지지율을 얻은 존슨 후보를 여론조사 회사들마저 무시했으니 언론이 군소 후보를 홀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군소정당이나 무소속 후보들은 텔레비전 토론 참여는 물론 참관에서도 제외되었다. 미국 대선토론위원회는 2000년부터 5개 여론조사 결과 평균 15% 이상의 지지도를 획득한 후보에게만 토론 참여 자격을 주기 때문이다. 군소 후보들의 토론 참가조차 막는 것은 불만에 찬 그들이 현장 소란을 피울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다. 그야말로 원천 봉쇄다.

한국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언론의 여론조사 5% 이상이거나 국회의원이 5명 넘는 정당 후보에게는 자격을 준다. 그래서 1% 안팎의 후보가 45∼49% 후보들과 함께 토론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미국의 자유당과 1%가량의 지지를 얻은 녹색당 등 4명의 후보는 그들만의 토론을 벌였으나 주요 언론이 중계는커녕 보도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러한 언론의 냉대와 무관심에 미국 내 군소정당 후보들과 지지자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군소정당이 성공하는 데 제도적 장벽은 없으나 오로지 언론의 무관심, 무보도가 제3의 길을 막고 있다는 것. 날마다 두 후보만 조명하고, 그들의 얘기만 들려주는 것은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해야 할 언론의 적절한 기능이 아니라는 것이다.

군소 후보들과 지지자들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권력은 독점하고 있을지라도 이념과 사상은 독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언론이 군소정당 후보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양극화한 미국 사회에 새로운 목소리와 통찰력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언론만 제대로 보도해 주면 승리할 가능성도 없지 않으며, 양당 독점 정치체제인 미국의 파시즘을 끝낼 수 있다고 아우성이었다. “언론의 정치적 옹졸함이 미국 민주주의를 감금 상태로 몰고 있다.” 1800년대 중반 이래 선거 보도에 대한 비판의 핵심 내용이다.

여론조사기관도 지지율 조사서 제외

그러나 미국 언론은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일관되게 지지율이 높은 양당 후보 중심의 보도 관행을 유지하고 있다. 언론은 “군소 후보들이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들을 다뤄 주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후보들이 수없이 많으나 신문 지면과 방송 시간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후보를 평등하게 다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언론은 “후보자들을 떠받쳐 주고 정당성을 주는 것은 언론이 할 일이 아니다. 3당 후보를 원하는 것은 국민의 책임이다. 만약 군소 후보들이 잘한다면 언론은 따라갈 것”이라고 말한다.

일간 USA투데이의 정치부장인 폴 싱어는 “언론의 보도 없이 유력 후보가 될 수 없다는 군소 후보들의 아우성에 동정이 간다. 그렇다고 그들이 유력 후보가 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언론은 특정 후보의 지원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군소 후보들이 특정 정치 사안에 관련되었거나 적정 수준의 신뢰도와 조직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보도할 것이나 민주당과 공화당의 싸움에 양념처럼 군소 후보의 발언을 끼워 넣을 어떤 의무감도 느끼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소란 피울까봐 TV토론 참관도 막아

미국 언론은 대체로 군소 후보를 선거 훼방꾼으로까지 인식한다. 의회 등을 생중계하는 비영리 케이블 채널 C-SPAN은 오랫동안 군소 후보들을 많이 다뤄 주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브라인 램 회장이 “제대로 된 선거 운동 조직도 없이 이름만 알리려는 이유로 출마한 후보자들을 골라 내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이라고 토로할 정도였다. 미국 언론은 유력한 두 후보만 집중 보도하는 냉정한 태도로 선거판의 후보 난립을 자연스럽게 걸러 주고 있는 셈이다.

이에 비해 한국 언론은 지지도 1% 후보조차도 너무 후하게 대접하고 있다. 왜 이렇게 너그러울까. 제3의 길이 열려야 한국 정치의 미래가 있다고 보는 것일까. 아니면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평등주의와 극렬한 이념 대결을 지나치게 의식한 탓인가. 아니면 과거 선거 때마다 특정 후보를 지원했다는 의심을 받아 온 탓인가.

이유가 무엇이든 한국 언론은 대선 보도에 관한 한 공평보도의 강박관념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거 결과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군소 후보를 제법 비중 있게 보도하는 것이 객관 언론의 자세라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라도 그런 태도가 바람직한 것인가 따져볼 것을 권하고 싶다.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대선#박근혜#문재인#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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