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권지예의 그림읽기]쌍무지개는 볼 수 없어도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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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버렛 밀레이 ‘눈먼 소녀’, 1856년.
존 에버렛 밀레이 ‘눈먼 소녀’, 1856년.
길을 가던 두 소녀가 들판의 밭둑에서 잠시 쉬고 있는 중입니다. 비가 그친 하늘에는 쌍무지개가 떴군요. 아마도 자매로 보이는 남루한 행색의 두 소녀 중 언니는 맹인입니다. 어린 동생은 언니의 눈을 대신해 보필하느라 언니 손을 꼭 잡고 있네요. 언니의 치마폭에 아코디언처럼 보이는 악기가 놓인 걸로 보아 거리의 악사가 아닐까 싶네요. 어린 소녀는 고개를 돌려 쌍무지개를 정신없이 보고 있지만 맹인인 소녀는 그저 눈을 감은 채 앉아 있군요. 세상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깜깜하다면…? 밤이나 낮이나 그저 검은 어둠뿐이라면? 누구에게나 상상하기 싫은 두려움이겠지요.

몇 년 전에 본 전시가 생각나네요. ‘어둠 속의 대화(Dialogue in the dark)’라는 전시였지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일상의 현실에서 완전한 어둠을 체험할 수 있는 전시였습니다. 어떤 가느다란 빛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눈을 떠도 감아도 보이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의 빽빽한 어둠, 제 존재마저도 어두운 심연으로 빨아들이고야 말 것 같은 예측할 수 없는 막막한 공간에 시각장애인용 케인 하나만 손에 쥐여졌습니다. 저는 완벽한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소리들이 저를 공격했습니다. 새소리, 차소리, 사람소리….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일상의 모든 소리들은 순간 의심과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전시장에 괜히 들어왔다고 잠시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허공을 향해 손을 휘두르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저쪽에서 가이드 아가씨의 낭랑한 목소리가 한 줄기 샘물처럼 제게로 흘러들었습니다. 얼마나 기쁘던지요. 그러나 소리 나는 곳이 정확히 감지되지 않아 저는 하마터면 다리 밑으로 빠질 뻔했어요. 마침내 혼자 서투르게 보행을 하며 도심의 차도를 지나고, 숲 속 공원도 지나고, 시장에 들러 물건도 사고, 카페에 가서 차도 주문해 마셨지요.

그러나 그렇게 ‘성공적인 일상’을 살아내게 되기까지 제 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갈등과 감정들이 교차했는지 모릅니다. 어둠을 받아들이자마자 저는 모든 건 눈을 똑바로 떠야만 볼 수 있다는 제 편견과 오만을 포기했습니다. 그러자 제 온몸의 감각이 새록새록 살아났습니다. 시력을 대신할 수 있는 청각과 제 인식에 확신을 주는 촉각이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제가 이 어둠 속에서 주어진 현실 속의 상황을 성공적으로 잘 수행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서서히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저를 안내하는 시각장애인 가이드가 “힘내세요. 할 수 있어요!”라고 용기를 주고 제가 그녀를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데서 오는 힘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도 모른 채 숲 속의 벤치에서 만나 잠시 쉬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삶의 의욕과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씩씩하게 살아가는 가이드 학생이 너무도 사랑스러웠습니다. 그 친구를 믿어버리자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제 발걸음에 자신이 붙었습니다. 온몸과 마음이 눈이 되어 옆에 있는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훤히 보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서로 용기를 북돋우며 배려해주며 전시장을 무사히 나온 후 그 학생과 서로 뜨겁게 안고 헤어졌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장애우들에겐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그들에게 주는 신뢰나 따뜻한 마음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절절하게 깨달았습니다. -끝-

권지예 작가
#작가 권지예의 그림읽기#미술#눈 먼 소녀#멀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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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많은 댓글

  • 2012-06-30 09:10:35

    하늘로 가는 다리 그러니 쌍무지개 있다면 땅의 계곡에 출렁다리나 강물에 편리한 다리 땅에는 도로길이 있다? 아슬아슬한 출렁다리를 지나는 영화장면을 보아도 오금이 저려 눈을 감는다? 조그만 싫다면 보여도 보지않거나 보지못하는 남을 도우는 소중한 분들이 얼마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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