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호의 옛집 읽기]<21>‘그림속의 집’ 고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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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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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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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철학자는 산책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칸트도 그렇고, 독일의 물리학자들은 난제에 부딪힐 때마다 등반에 가까운 산책을 했다. 퇴계도 자주 낙동강 상류를 산책했다. 지금은 안동댐에 잠겨 대부분 그 자취가 사라졌지만, 도산서원 앞의 탁영담부터 청량산 초입까지는 그대로 남아 있다.

고산정(孤山亭)은 퇴계의 산책길인 가송협에 지어진 성재 금난수(惺齋 琴蘭秀·1530∼1604)의 정자다. 금난수는 퇴계의 제자지만 그의 저술에 대해서 자세하게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그의 학문이 얕았을 거라고 짐작하는 것은 금물이다. 근대학문은 그 사람의 저술로 학문적 입지를 판단하지만, 조선시대 유교적 전통에서는 입덕(立德)을 가장 높이 치고, 입공(立功)을 다음으로 쳤으며 입언(立言)을 마지막에 두었다. 왜냐하면 어떤 이의 학문은 반드시 그 사람의 삶의 태도로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삶과 유리된 지식은 아무리 화려해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이 옛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다행히 그 삶을 엿볼 수 있는 건축이 여럿 남아 있다. 금난수의 고산정도 그 하나이다. 낙동강 상류의 가송협을 이루는 취벽과 고산은 마치 낙동강이 용으로 현신해 꿈틀대며 날아오르다 끊어 놓은 것처럼 뚝 잘려 있다. 그 결과 서쪽에 있는 절벽이 고산이 되었고, 동쪽에 있는 절벽이 취벽이 되었다.

고산정은 이 취벽 아래에 얼굴만 살짝 드러내놓고 동강 난 자신의 반쪽인 고산을 바라보며 숨어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굉장히 여성스러운 정자 같아 보이는데 그렇지 않다. 정자의 건축적 구법은 굉장히 남성적이다. 강변에서 석축을 쌓아 대지를 들어 올리고, 거기에 다시 기단을 만들고 덤벙주초(자연석 주춧돌)를 세웠다. 주두 상부에도 보아지(보의 짜임새를 보강하는 짧은 나무)를 끼웠으나 외부에는 무늬를 새기지 않았다.

첫눈에도 여성스럽기보다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안배가 집 곳곳에서 보인다. 더구나 계자난간을 두르고 가운데서 정자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양 끝에서 오르게 되어 있는 점도 특이하다. 정자치고는 넓은 정면 세 칸에 측면 두 칸이고, 양쪽에 방을 두었는데 왼쪽 방은 통간이고, 오른쪽 방은 뒤로 물러난 한 칸이다. 따라서 마루가 거꾸로 된 ‘ㄴ’자로 배치되어 있다.

퇴계는 자신의 산책길을 도산구곡(陶山九曲)이라 부르고 그곳을 산책하는 것을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표현했다. 고산정은 퇴계의 그림 속에 있는 집이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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