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구한말 조선을 바라본 ‘긍정의눈’]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한국, 한국인

동아일보 입력 2011-11-05 03:00수정 2011-11-0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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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경찰은 초라했고 한국죄수는 당당했다
‘시골 결혼잔치’ 1921년, 채색 목판화. 엘리자베스 키스는 한국의 일상적인 모습을 즐겨 그렸다. 그림 속 20여 명의 동작과 표정이 아주 사실적이다. 책과함께 제공
1919년 3월 28일, 영국 여류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독립만세운동이 한창이었다. 한국에 오기 전 이미 이 운동을 알고 있었던 엘리자베스는 현장의 비극을 직접 피부로 느꼈다. 어느 날, 그는 일본 헌병에 끌려가는 한국인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죄수들은 짚으로 된 삐죽한 모자를 쓰고 짚신을 신은 채 줄줄이 엮여 끌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6척 또는 그 이상 되는 장신이었는데, 그 앞에 가는 일본 사람은 총칼을 차고 보기 흉한 독일식 모자에 번쩍이는 제복을 입었지만 덩치가 왜소했다. 죄수들은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그들을 호송하는 일본 사람은 초라해 보였다.”

독립운동 하다 감옥에 갇힌 여학생

3월 운동 기간에 키스는 무엇보다 남자 못지않게 싸우는 여성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과거에는 담 밖의 세상을 엿보기 위해 마당에서 널뛰기를 했던 여자아이들이 독립만세운동 때는 비밀문서를 전달하며 지하조직에 참여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이화학당 교장인 앨리스 아펜젤러(배재학당을 세운 헨리 아펜젤러의 딸·이화학당 교장을 지냄)와 함께 감옥에 갇힌 여학생을 면회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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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의) 구멍이 어찌나 작은지 이쪽저쪽으로 머리를 움직여야만 여학생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루스(Ruth)라고 불리는 이 여학생은 반질거리는 까만 머리를 등 뒤로 땋아 내렸고 기품이 있는 얼굴이었다. 여학생은 왜 자기가 학교의 명령을 어기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는지 말했다. 동정을 구하는 표정이라기보다는 승리한 자의 모습이었다. 선생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었지만 루스는 조용하고 침착했다.”

키스는 한국 사람들의 그림을 그리면서 한국인의 정서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구한국 군인 제복을 입은 무인을 그릴 때는 멸망한 조국의 명예를 더럽히고 싶지 않은 한국인의 내면을 다음과 같이 포착했다. “그는 이 제복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모든 것을 제대로 보여주려고 하면서 작대기도 올바르게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무인은 자신이 차고 있는 검에도 커다란 자부심을 가졌다.”

옛 궁정관료의 집을 방문했을 때는 시대의 우울을 느꼈다. 그는 집주인과 어떠한 깊이 있는 대화도 나눌 수가 없었다. 집 안의 음울한 분위기로 보아 일본 정부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한국인들은 시들어 가고 있었다. 어디에서 누굴 만나는지, 무슨 책, 무슨 신문을 읽는지 일본에 일일이 보고하는 것은 자기 집 안에서 족쇄가 채워진 것과 같았다.

한 젊은 의사는 그에게 “한국이 일본보다 정신적으로 더 풍요롭다”는 역설적인 말을 들려주었다. 일본이 서구에서 배운 것은 오직 물질문명이었지 정신적으로는 파탄이라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정신적 바탕 위에 건립되지 않은 나라는 결국 재난을 당합니다.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진실로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일본은 정신적으로 가치 있는 문화를 절대로 건설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해낼 겁니다.”

한국에 와서 일본에 대한 인식 바꿔

‘정월 초하루 나들이’ 1921년, 채색 목판화. 책과함께 제공
키스가 한국에 있는 동안 교류했던 앨리스 아펜젤러는 20여 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느낀 일본과 한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치밀하게 계획된 일본의 악선전으로 인해 한국인들의 성품이나 공적은 폄훼되었고, 온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실상인 양 믿었습니다. 일본은 줄기차게 한국 사람들을 무식하고 후진적이라고 악평을 해댔지요. 그러나 일본은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알았고, 2400만 한국 사람들이 강인하고 지성적이며 슬기로운 민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 일본에서 목판화 기법을 배우며 동양적인 정취에 흠뻑 빠져 있던 키스는 한국에 와보고 나서 일본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꿨다. “그동안 서구는 ‘군기가 엄하고 부지런하며 싹싹한’ 일본이 한국을 문명국가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서구는 일본을 크게 오판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처럼 한국의 문화와 미술을 존경하고 일본의 무력통치를 반대하는 인사들도 있다고 소개했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교육계와 기독교계에 몸담고 있거나 사회주의를 신봉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일본 내에서 핍박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어떤 인사는 “일본인은 육체적인 면에서는 선천적으로 용감한 듯하지만 도덕적인 용기는 별로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키스가 한국에서 벌어진 일을 이야기해주자 그는 “어쩔 도리가 없어요. 우리 군부는 미친개와 같아서”라고 탄식했다.

20여 년 동양 여행하며 그림 그려

키스와 동생 엘스펫은 1919년 3·1운동 직후에 한국을 여행했다. 1915년 동생 부부가 일본에 정착할 때 키스도 동행해 함께 살게 됐다. 그는 20여 년 동안 한국 외에도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다. 판화 수채화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동양의 색채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판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키스는 평생 미혼으로 살며 그림을 그리다 1956년 세상을 떠났다.

그와 동생이 함께 만든 책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책과 함께·2006년)는 한국인의 내면을 조명하면서 부당한 식민지의 현실을 고발하는, 감성과 이성을 겸비한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키스의 목소리는 부드럽고도 단호했다. 책에는 ‘정치적 성명서라기보다는 한편의 시 같은 느낌’이라면서 3·1운동 때 배포된 ‘독립선언서’(우리가 아는 독립선언서와는 다른 듯)의 한 구절이 소개돼 있다. ‘거룩한 단군의 자손인 우리들/온 사방에는 우리의 적들뿐/우리는 인류애의 깃발 아래 목숨을 바친다/구름은 검어도 그 뒤에는 보름달이 있나니/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약속하도다.’

박수영 작가·건국대 겸임교수 feenpark@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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