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박해람/‘버들잎 經典’

  • 입력 2006년 9월 22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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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에 버드나무 한 그루

제 마음에 붓을 드리우고 있는지

휘어 늘어진 제 몸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휙휙 낙서를 써 갈기고 있다

어찌 보면 온통 머리를 풀어헤치고

헹굼필법의 머리카락 붓 같다

발 담그고 머리 감는 갠지스 강의

순례객 같기도 하고.

낙서로도 몇 마리의 물고기를

허탕치게 하는 재주도 부럽고

낙서하기 위해

몇십 년을 허공으로 오른 다음에야 그 줄기를

늘어뜨릴 줄 아는 것도 사실 부럽다

쓰자마자 지워지는

저만 아는 낙서 경전(經典)

지우고 또 지우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지며 흐를 뿐이지만

물 묻은 제 마음이 물 묻은 제 문장을 읽는

제가 저를 속이는 독경(獨經)

지구의 모든 문장이 저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참 대책 없다.

-시집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

(랜덤하우스) 중에서》

무릇 모든 굴광성의 식물은 새 가지부터 태양을 향하지만, 유독 버드나무 새순이 제 발밑 그늘을 스치는 까닭은 무엇인가. 굽은 버드나무 가지가 허리를 펴는 때는 언제인가. 낙서도 평생을 저리 경건하게 하는 것이라면 ‘낙서’와 ‘경전’의 차이는 무엇인가. 저를 속이는 것이 ‘물 묻은 제 마음이 물 묻은 제 문장을 읽는’ 것이라면, 저 독경은 얼마나 슬프고도 따뜻한 것인가. ‘지구의 모든 문장이 저와 같’으니 세상은 천 년 붓질에도 파지 한 장 없는 것 아닌가.

-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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