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83>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0월 18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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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이제 우리 서초(西楚)의 맹장(猛將)과 정병(精兵)은 거의 모두 이 성양(城陽)으로 데려온 셈입니다. 팽성에 아직 10만 대군과 여러 장수가 남았다 하나, 그래도 나라의 도읍을 너무 허술하게 비워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군사를 이끌고 성양에 이른 날 범증이 그런 걱정을 했다. 그러나 패왕은 터무니없다는 듯 웃으며 받아넘겼다.

“과인이 없다 해도 10만 대군이 지키는 서초의 도성이외다. 누가 감히 넘겨본단 말이오?”

“한왕 유방이 다시 임진관(臨晉關)을 나와 하수(河水)를 건넜다니 아무래도 마음 놓이지 않습니다. 하동을 지키는 서위왕 위표도 믿을 수 없고, 하내의 은왕 사마앙도 그렇습니다. 이미 한왕(韓王) 정창과 하남왕 신양의 항복을 받아 기세가 오른 터에 다시 하동 땅과 하내 땅을 어우르게 되면 간이 부푼 유방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더구나 팽성의 지세는 드넓은 들판 가운데 있어 사방이 열려 있는 형국입니다. 깊은 물이나 험한 산이 가로막지 않아 밖으로 뻗어 나가기에는 좋으나, 제자리에 앉아서 지키기에는 결코 이롭지 못합니다. 사방으로 적을 받게 되어 있어 웬만한 대군으로는 지키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범증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패왕이 다시 너털웃음으로 범증을 안심시켰다.

“임진관에서 팽성까지는 2000리 가까운 길이니 아부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성양은 내일이면 떨어지고 전영은 사로잡힐 터, 설령 유방이 오늘 당장 팽성으로 밀고 든다 해도 우리가 먼저 팽성에 돌아가 있게 될 것이오.”

그리고 다음날 날이 밝는 대로 맹렬히 성양을 공격했다. 범증의 말대로 서초의 맹장과 정병들이 모두 나선 공성(攻城)이었으나, 워낙 성벽이 두텁고 높은 데다 안에서 지키는 사람들이 악착같았다. 제왕(齊王) 전영의 군사들과 성안 백성들이 한 덩이가 되어 죽기로 맞서니 패왕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적지 않은 장졸만 다치고 다시 사흘이 헛되이 지나갔다. 하지만 서초의 군사가 워낙 많은 데다 지난 3년 곳곳에서 피투성이 싸움을 벌이며 날래고 모질게 단련돼 있었다. 다시 닷새째 되는 날 밤, 벌써 열흘이나 쉴 새 없이 싸워와 지친 성양 성안의 군민(軍民)들은 초나라 군사들의 매서운 야습을 견뎌내지 못하고 성을 내주었다.

“전영을 사로잡아라! 전영을 사로잡으면 천금(千金)의 상에 만호후(萬戶侯)로 올릴 것이다!”

성문이 열리자 패왕은 먼저 전영부터 사로잡아 오게 했다. 하지만 밉쌀 맞게도 전영은 성이 떨어지기 전에 300 여기(騎)를 거느리고 북문으로 달아나고 없었다. 패왕이 펄펄 뛰며 군사들을 풀어 전영이 달아난 곳을 알아보게 했다.

오래잖아 전영이 평원(平原)으로 갔다는 게 알려졌다. 패왕은 사마 용저(龍且)에게 5000 군사를 주며 전영을 뒤쫓게 했다. 용저가 밤을 낮 삼아 평원으로 달려가니, 다행히도 패왕을 두려워한 평원의 백성들이 전영을 죽여 그 목을 바쳐 왔다.

살아있는 전영에게 분풀이를 못한 게 패왕에게는 분통 터지는 노릇이었지만, 그래도 그 목을 얻은 것으로 급한 불길은 잡힌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뒤처리가 다시 패왕의 발목을 잡아 그 뒤 석 달 가까이나 더 수렁 같은 제나라 땅에 묶어두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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