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3월 첫째주

  • 입력 2004년 2월 29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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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4월 부산 임시교사에서 졸업식을 가진 서울대 공대 제6회 졸업생들. 이때까지만 해도 꽃다발 풍습이 없었던 듯 졸업생들은 돌돌 만 ‘빛나는 졸업장’만 들고 있을 뿐이다.  -서울대 40주년 기념사진집
1952년 4월 부산 임시교사에서 졸업식을 가진 서울대 공대 제6회 졸업생들. 이때까지만 해도 꽃다발 풍습이 없었던 듯 졸업생들은 돌돌 만 ‘빛나는 졸업장’만 들고 있을 뿐이다. -서울대 40주년 기념사진집
▼이 現象 이대로 둘 것인가▼

卒業과 入試를 에워싼 하나의 問題

지난 二일부터 시작된 중고등학교 졸업식에 갑자기 유행된 ‘꽃다발’ 사태에 일반은 아연실색하고 있다.

해방 후 무질서하게 수입된 양풍(洋風)에 휩쓸려 이 나라 극장무대를 덮어 오던 ‘꽃다발’이 이제는 또한 학원을 뒤덮게까지 되었는데 이 졸업을 축하한다는 ‘꽃다발’에는 자연 ‘돈’이 뒤따라 ‘허영의 낭비’만을 초래하고 있다.

이 ‘꽃다발’에 뒤이어 앞으로 점차 박도해오는 각급학교의 입학시험 지옥이 또한 스스로 거액의 ‘돈’을 대기하고 있으니 요즘의 학원은 마치 ‘황금의 난무장(亂舞場)’인 양 가난한 이 나라 학부형들을 울리기만 한다.

<1954년 3월 5일자 동아일보에서>

▼‘쌀 한가마’값 넘는 졸업식 꽃다발 대유행▼

‘졸업식 꽃다발’을 ‘양풍(洋風)’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그게 광복 직후 미군정이나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을 통해 유입된 풍습이기 때문인 듯하다.

단순히 물 건너온 풍습이라는 측면만 문제가 되었던 건 아니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금선화(金仙花), 동백꽃 등을 몇 가지씩 묶어 최하 1000환, 최고 6000환짜리를 아낌없이 사가는 판”이라고 한 것을 보면 비용도 큰 문제였다. 1954년 3월 현재 쌀 한가마 값이 2600환이었으니 ‘1회용 꽃다발’에 이렇게 큰돈을 쏟아 부어도 되느냐는 지적이 나올 만했다.

그래서 일부 학교는 ‘졸업식 꽃다발 금지’를 선언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지켜졌던 것 같지 않다. 당시 서울시내 중고교 졸업생이 모두 1만6414명이었는데 그중 3분의 1 정도가 꽃다발을 받았다는 게 동아일보 취재팀의 추계였다. 당시 온실도 없었을 터이니, 꽃을 조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꽃을 감당하지 못해 조화(造花)로 대용하는 가게가 수두룩했다는 것이다.

꽃다발 풍습은 곳곳에서 화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남녀교제가 자유롭지 않던 그 시절, 어떤 여학교 졸업식에서는 남학생 3명이 한 여학생에게 동시에 꽃다발을 주면서 서로 눈을 흘기는 풍경이 벌어져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요즘 졸업식에서 ‘꽃다발 허영’을 탓하는 사람은 없지만, 다른 면에서 졸업식 세태를 개탄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크다. 졸업하는 친구에게 밀가루를 뿌리고 교복을 찢는 장면이 보도돼 세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가 하면, 재학생 송사와 졸업생 답사가 생략되고 석별의 눈물도 사라져 졸업식이 삭막해졌다고 아쉬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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