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자하동

입력 2002-12-27 18:04수정 2009-09-17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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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동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청운동 창의문 아래 북악산 기슭을 일컫던 동네 이름이다. 한자로는 ‘붉은 노을 속에 잠긴 마을’이라는 환상적인 뜻이지만 사실은 순우리말 ‘잣동’을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본래 산이 많은 까닭에 예로부터 도읍을 산악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에 건립해 왔다. 따라서 자연히 성곽은 산등성이를 따라 쌓게 되니, 산마루를 뜻하는 ‘자’ 또는 ‘재’가 그대로 성의 의미로 쓰이게 됐다. 이에 산마루 위로 나있는 성문은 당연히 ‘잣문’으로, 그 아랫마을은 ‘잣동’ 또는 ‘잣골’로 불렀다.

그래서 고려 왕도인 개성의 북성문(北城門) 아래에도 자하동이 있고, 조선왕조의 도읍지인 한양 서울의 서북문 아래에도 자하동이 있다.

‘잣동’을 꼭 자하동이라 표기한 것만은 아니다. 백동(栢洞) 또는 백자동(栢子洞), 척동(尺洞) 등으로 쓰기도 했다. 모두 ‘잣’ 또는 ‘자’라는 우리말 훈(訓)을 가진 한자들이다. 동소문인 혜화동 아랫동네를 백동이나 백자동으로 표기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다.

따라서 자하동은 ‘자문’이란 순우리말로 불리던 자하문, 즉 창의문 바로 아래에 있던 동네라 해야 하겠다.

그림으로 봐도 북악산 동편 북쪽 끝자락이 내려와 마을 뒷산을 이루고 있다. 당연히 북악산과 인왕산쪽에서 흘러오는 시냇물이 이 마을을 앞뒤로 휘감아 돌아나갔을 터인데 남쪽으로 장동(壯洞) 골짜기가 시원하게 툭 터져나가 한강까지 한눈에 잡히게 되니 서울 도성 안에서 이만한 명당자리는 다시없을 듯하다.

그래서 풍류를 아는 어떤 거부가 이곳에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짓고 살았던 모양이다. 겸재 시대에 이곳에 이렇게 운치 있는 대저택을 짓고 살 만한 사람은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1653∼1722) 문하에서 겸재와 동문수학했던 모주 김시보(茅洲 金時保·1658∼1734)밖에 없다.

김시보는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1561∼1637)의 고손자로 충청도 홍주의 갈산과 모도(茅島) 일대에 많은 장토(庄土·전장과 토지)를 갖고 있던 거부인데 진경시(詩)의 대가로 인정받던 풍류객이다.

선원 고택인 청풍계의 주인이기도 한 그였지만 청풍계를 종손에게 넘겨주고 그는 이보다 더 운치 있는 이런 생활공간을 따로 마련해 살았던가 보다. 이 집은 그의 7대손인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1846∼1922)까지 전해지는데 동농이 망국기에 농상공부 대신 등을 지내다 나라가 망한 뒤 복국(復國·나라를 회복함) 운동에 뛰어들면서 이 집은 남의 손에 넘어가 백운장(白雲莊)이라는 요릿집이 되고 말았다.

영조 27년(1751) 종이에 엷게 채색한 29.3×33.5㎝ 크기의 그림으로 간송미술관 소장.

최완수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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