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기자의 섹스&젠더]고백 그 이후…

  • 입력 2002년 12월 19일 16시 37분


수신인:kimsunmi@donga.com

제목:도와주세요.

안녕하세요.

살면서 늘 가슴 속 답답한 것이 있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됐습니다.

저는 30대 초반의 여성입니다. 20대 초반에 해외 교포와 결혼해 외국에 간 뒤 이혼하고 홀로 2년만에 서울로 돌아온 경험이 있습니다. 철 모르던 시절 결혼을 했는데 그곳 결혼생활은 제게 감옥 같은 삶이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후 상처받은 마음을 다시 잡고 지금은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전 남편과 극심한 성격 차이를 겪었을 뿐만 아니라 낯선 외국 생활이 답답할 정도로 숨막혔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 남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 친구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남자는 내년에 결혼하자고 제게 프로포즈했습니다.

제가 김선미 기자께 여쭤보고 싶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제가 과거 결혼했던 사실을 지금의 남자에게 고백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제가 사실대로 말하게 되면 “그 사람이 널 어떻게 생각하겠니”라고 말립니다.

결혼과 섹스의 경험이 있는 제가 그 앞에 어떤 입장으로 서야 하는지…. 제 성격이 워낙 내성적이라 누구에게도 이런 고민을 털어놓지 못합니다. 제가 앞으로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요.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을 기다리며

12월9일 독자

수신인:12월9일 독자@xxxxx.com

제목:희망을 가지세요.

안녕하세요. 김선미 기자입니다.

커피, 음악, 책과 함께 휴일 한나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흘러나오는 음악은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가 연주하는 아르헨티나 출신 작곡가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탱고 발레’ 음반 중 ‘천사의 협주곡’입니다. 탱고음악에 쿨 재즈와 쿨 클래식을 혁신적으로 도입해 ‘누에보 탱고’의 창시자로 불리는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음악세계에 대해 기돈 크레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음악에는 에너지와 강한 떨림이 있다. 그 힘은 우리 존재의 진정한 기쁨을 느끼게 해 준다.”

천사의 등장→천사의 밀롱가(Milonga·탱고의 전신)→천사의 죽음→천사의 부활 순으로 전개되는 천사의 협주곡을 듣다가 문득 ‘12월 9일 독자’분(편의상 이렇게 부르겠습니다)을 떠올리게 된 것은 아마도 제게 보내주신 편지가 나지막이 내뿜던, 삶을 향한 강한 떨림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얼마 전 당신처럼 한 번의 이혼 경험이 있는 남자와 비슷한 내용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는 고민 끝에 과거의 이혼 사실을 밝히고 재혼했습니다.

“남녀관계처럼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반성과 후회가 많은 관계가 또 있을까요. 인생의 전환점에 서게 돼서야 젊었을 때의 실수에 대해 ‘아, 내가 경솔했구나’ 하고 때늦은 후회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마음 속 깊이 우러나오는 반성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나간 잘못을 부인하는 것은 인생을 대하는 진실한 태도가 아닙니다. 과거가 아름다우면 아름다운대로, 후회되면 후회되는 대로 받아들이면서 현재의 소중한 사람에게 충실하게 대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지금 사귀는 분에게 당신이 과거 결혼했던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좋을 듯합니다. 영원한 비밀은 없을 뿐더러 스스로 불편한 관계는 지속되기 어려운 경우를 여럿 봤습니다. 온전히 제 개인적 바람으로는 당신의 상대가 당신의 고백을 듣고 ‘인간은 누구나 한번쯤 실수할 수 있다’고 마음을 활짝 열어줄 수 있는 남자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선 상대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대가 당장은 ‘괜찮다’고 해도 나중에 다른 얘기를 할 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고백하지 않았을 때 당신이 겪을 내적 고민과 고백 후 펼쳐질 수 있는 차가운 현실을 잘 저울질해 봐야겠습니다.

저는 요즘 한 권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미국 작가 너새니얼 웨스트가 쓴 ‘미스 론리하트’입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당신이 제게 편지를 보낸 것처럼 소설 속 1930년대 사람들은 미국 뉴욕의 신문기자 ‘미스 론리하트’에게 편지를 보내 조언을 구합니다. ‘친애하는 미스 론리하트’로 시작하는 그들의 편지 속에는 고통스럽고 지긋지긋한 인간 군상의 모습이 가득 차 있습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12월 9일 독자’분을 둘러싼 상황은 그들에 비하면 훨씬 희망적입니다. 용기를 내세요.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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