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132…백일 잔치 (17)

  • 입력 2002년 9월 26일 11시 05분


참외, 복숭아, 사과, 배, 가지, 양파, 마늘, 오이, 감자, 김, 파래, 콩, 팥, 녹두, 미수가루, 콩가루, 밀가루, 쌀, 보리, 조, 미역, 북어, 색, 색, 색, 색, 스물네 가지 색이 있어도 모자랄 것이다.

희향은 어렸을 때부터 한 여름의 가게문 닫는 시간을 좋아했다. 어둠이 점차 짙어지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참외를 파는 농부는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고, 옥수수를 뜯어먹으면서 조 파는 아줌마와 수다를 떨던 아줌마도 화젯거리가 다 떨어져 따분한 표정을 짓고, 뜸해진 손님들을 향해, 자 싸요 싸, 막 떨이요 떨이, 하나에 2전이요, 하고 늘어진 소리를 질러 보지만, 손님들의 눈길은 처마 끝에 걸려 있는 알전구에 부딪히는 나방처럼 허둥허둥, 폭삭 시든 미나리며 상추며, 몇 마리는 뒤집혀 허연 배를 보이고 있는 미꾸라지며 잉어 위를 그냥 스쳐지나간다.

팔다 남은 사과와 배를 함지박에 담아 머리에 이고, 둘둘 만 자리를 옆구리에 끼고 흐느적흐느적 걸어가는 아줌마들, 희향은 수박을 얹은 지게를 지려는 농부에게 말을 걸었다.

“얼만가요?”

“5전만 내이소. 비학산까지 가야 하는데, 지고 가기 무거우니까 그냥 떨이다”

희향은 5전을 내고 두 손으로 수박을 껴안았다. 우근이보다 가볍다. 우근이는 어쩌고 있을까, 서둘러 돌아가야지. 귀갓길을 서두르다-, 희향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었다. 조선시대든 일제시대든, 귀갓길을 서두르는 사람들은 한결같다. 어떤 시대에든 우리들은 어두컴컴한 밤길을 서둘러 피붙이가 불을 켜놓고 기다리는 집으로 간다. 나는 집이 있다.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갈 곳이 없다. 이 땅에 태어났을 때부터 이 땅에서 죽기로 정해져 있었다. 떠돌이 이 사람하고는 다르다. 이 사람이 설사 그 여자와 집을 나간다 해도 나는 귀갓길을 서두른다. 자식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시장을 빠져나가자 길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던 풍경 소리가 딸랑 딸랑 딸랑, 희향은 무의식중에 수박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우근이를 재울 때처럼.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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