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네트워크]중소벤처기업 '여성CEO 모임'

입력 2002-03-21 14:33수정 2009-09-18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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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사우나 문화’라는 게 있다. 벌거벗은 몸을 서로 보여주다 보면 아무래도 스스럼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덕분에 사우나는 비즈니스맨들의 사교 공간으로 활용되지만 비즈니스 우먼의 경우 사정이 약간 다르다. 일로 만난 사람에게 알몸을 보여준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각종 파티를 기획하는 클럽아리닷컴의 강모선 사장(29)도 얼마 전까지 그랬다. 사우나를 남성 네트워크의 전유물로 여겨왔던 것. 하지만 지난해 12월 ‘73년생’ 동갑내기 여사장들과 사우나를 하면서 그 벽을 깼다. 사우나 파트너는 미술품 인터넷 판매사이트인 인터페인트를 운영하는 김성희 사장과 음식점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는 ㈜진스의 진미원 사장 등이었다.

힘들수록 네트워크가 절실했다는 '젊은' 여성CEO모임의 핵심멤버들이 8번째 모임을 가진 뒤 한 건물 옥상에서 시내를 배경으로 당당하게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주)진스의 진미원, IF디자인의 박선후, 인터페인트의 김성희, 토트의 박은영, CGL의 정은주, 클럽아리닷컴의 강모선, GEM의 안경숙사장

“다들 입구에서 쭈뼛쭈뼛했어요. 대부분 사회에서 알게 된 사람과 함께 사우나를 가는 건 처음이었거든요. 들어갔다 오니 서로가 훨씬 가까워졌죠. 무엇보다 사업 네트워크 공간을 사우나로까지 넓힌 ‘첫 경험’이라는 데 흐뭇해 했죠.”(강 사장)

이들을 묶어준 곳은 인터넷 여성포털사이트 사비즈(www.sabiz.co.kr)에 개설된 ‘여성 CEO모임’. 인터넷 게임업체 GEM의 안경숙 사장(33) 등이 주축이 돼 만든 이 모임의 회원은 현재 약 300명에 이른다. 대부분 30대로 창업 1∼5년차에 직원 수 10∼20명의 중소 벤처기업체를 운영하는 여사장들이다.

창업 이후 명함에 과감하게 ‘CEO’란 직함을 새겨넣고 다니긴 했지만 홀로 이리저리 부닥치느라 수없이 시행착오를 거쳤던 이들. 그때마다 절실했던 것이 ‘네트워크’였다.

“창업을 한 뒤 회계전표 만드는 것 등 사소한 것부터 막혔지만 어디 물어볼 데가 없었어요. 남자들은 학교 동창이다 고향 선후배다 물어볼 곳도 많던데…. 네트워크가 부족하다면 네트워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진미원 사장)

특히 73년생 CEO들은 아예 ‘73 CEO 모임’이란 소모임까지 만들었다.

“벤처기업을 중심으로 여성 CEO들이 늘면서 여러 모임이 생겼지만 사업 경력이 짧은 여성 CEO들이 찾아갈 만한 곳은 별로 없었어요. 각종 협회 등에서 만든 여성 CEO 모임을 기웃거렸지만 대부분 40∼50대의 사업경험이 풍부한 ‘기성세대’가 주도권을 쥐고 있어 젊은 저희한테는 발언권도 잘 주어지지 않더군요. 공식적으로 오가는 얘기들이 영 낯설기도 했고요.”

모임 창설을 주도한 GEM 안 사장의 얘기다. 명칭이 ‘여성 CEO모임’으로 거창해 요즘 새로운 이름을 붙이려 고민 중이지만 쉽지 않다. 사람들에게 모임을 설명할 때면 이름 앞에 ‘젊은’이나 ‘새내기’라는 수식어가 빠진 것으로 이해해 달라고 부탁한다.

안 사장은 지난해 8월 첫 오프라인 모임을 가졌던 날을 잊지 못한다. 오후 7시경에 시작된 모임이 오전2시에야 끝났다. 이날 참석한 10명은 이후 모임에도 거의 참석하는 ‘핵심 멤버’가 됐다. ‘모두가 비슷한 고민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첫 모임은 큰 소득이었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의 해법도 찾을 수 있었다. 이들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직원들과의 갈등이었다.

“직원들이 왜 나처럼 열성적이지 않을까 항상 불만스러워 했죠. 하지만 모임에서 누군가가 ‘당신이 직원으로 일할 때를 생각해 봐라’고 하더군요. 나도 그때 지금처럼 목숨을 걸지는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직원들을 이해하는 게 훨씬 편해지더군요.” (강모선 사장)

모임이 있는 날이면 남편들은 아예 빠른 귀가를 기대하지 않는다. 문화상품 등을 만드는 토트디자인의 박은영 사장(37)은 때로는 남편에게 등을 떼밀려 모임에 나오기도 한다. 피곤해서 쉬려고 할 때도 남편이 “그런 모임에 자꾸 빠지면 나중에 뭐 갖고 사업할래”하고 성화를 내는 바람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렇게라도 나오면 뜻하지 않게 얻는 정보가 있어요. 저리의 정책자금이 새로 집행된다든지 박람회가 열리니 참가해 보라든지 혼자 있으면 놓치기 쉬운 정보들이죠.”

이 모임에는 똑같은 사업아이템을 가진 회원이 없다. 모두 틈새시장을 찾아서 창업을 한 때문인지 업종은 비슷하지만 사업내용은 어디가 달라도 조금씩 다르다. 덕분에 서로 힘을 합칠 경우 발생되는 시너지 효과는 훨씬 크다. 일부 여성기업가들의 모임에서 같은 아이템을 놓고 빚어지는 경쟁의식이나 눈치보기를 별로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이들을 편안하게 한다. 요즘은 회원들이 운영하는 회사를 차례로 돌며 ‘일일 세미나’를 갖는다. 초대하는 회사의 CEO는 참석자를 대상으로 간단히 자사의 사업아이템에 관해 브리핑을 한다.

“그동안은 격의 없는 만남을 해왔지만 이젠 서로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보려고 해요. 저희 회사가 해외 쪽에서 함께 일해온 에이전시가 있어 회원들의 해외 판로개척을 도와준다든지 다른 회사의 인력을 함께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 중입니다.”(웹에이전시 CGL 정은주 사장)

IF디자인의 박선후 사장(37)은 “다양한 업종의 사람들을 만나 사업영역을 넓히는 데 도움을 받았으면 했는데 일일 세미나가 그런 점에서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CEO라면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나 미국 GE의 잭 웰치 등 중량급 인사들을 떠올리는 기자로서는 젊은 여사장들이 ‘CEO’란 직함을 쓰기가 부담스럽지 않은지 궁금했다.

“CEO란 단어가 아주 일상적인 용어처럼 돼 버려 부담스럽지 않아요. 또 사장보다는 CEO라고 하면 사업파트너들의 태도가 달라지기도 하고요. 사업 경력은 짧지만 어쨌든 저희들도 엄연히 한 기업체를 운영하는 최고 경영자니까요.”(안경숙 사장)

박현진 기자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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