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찬의 문화비평]판단의 황금률

  • 입력 2001년 10월 16일 18시 28분


아침마다 어떤 옷을 입고 집을 나설지 판단하는 건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아무거나 편한 대로 입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옷의 목적은 이미 ‘털 없는 원숭이’의 몸을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선 지 오래다.

그래서 내가 택하는 방법은 무조건 양복을 입는 것이다. 양복은 한국사회에서 성인 남자가 큰 공을 들이지 않고 적당히 예의를 갖출 수 있는 편리한 복장이다. 그런데 양복을 입고 보면 어떤 넥타이를 맬 것인지 판단하는 것이 새로운 과제로 등장한다. 해결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넥타이는 안 매면 된다.

이 정도 복장이라면 도시에서 어떤 경우에 누구를 만나든 크게 예의에 벗어나지 않으면서, 필요에 따라 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적당한 자유로움을 누릴 수도 있다. 물론 아주 정중한 예의바름과, 혹은 어디서나 퍼질러 앉을 수 있는 자유의 만끽은 일단 포기해야 한다.

이런 판단은 옷의 목적과 기능을 몸의 보호와 외형적 예의 갖춤이라는 것으로 최대한 단순화한 데 따른 결과다. 행위의 목적과 기능에 대한 단순명료화. 이는 판단의 황금률이다.

데카르트가 가장 명석판명(明晳判明)하다고 파악한 것은 ‘생각하는 자로서의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 지점에서 철학은 다시 시작됐고, 그 이후로 철학사는 다시 쓰여졌다. 정의의 여신 디케(사진)가 한 손에는 저울을, 또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두 눈을 가린 채 서 있는 것은 세상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로부터 차라리 눈을 가리는 것이, 세상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보다 정의로운 판결을 위해 더 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너무 단순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칸트의 명제를 참고할 수도 있다. “너의 의지의 원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판단하고 행위하기 전에 ‘남들이 다 너처럼 판단하고 행위한다고 해도 괜찮겠냐’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만인이 평등하다는 단순명료한 원칙이 전제돼 있다.

그러나 기득권을 가진 많은 개인이나 집단은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과도한 권력을 휘두르거나, 위만 바라보며 복지부동에 몰두한다. 이런 경우, 단순명료해야 할 행위의 기능과 목적은 잊혀지고 온갖 이해관계로 얽힌 실타래만 남는다.

이럴 때는 또 다른 방법도 있다. 먼저 목욕재계 후, 짧은 젓가락만한 막대기 50개를 앞에 놓고 앉는다. 50개 중 근원을 상징하는 하나는 옆에 놓는다. 나머지 49개를 둘로 나누고 둘 중 어느 한 곳에서 하나를 다시 빼어 놓는다.

두 무더기를 각각 4개의 단위로 세고 남은 것을 합쳐서 손가락 사이에 끼운다. 여기서 남은 40∼44개를 가지고 다시 한번, 또 남은 32∼40개를 가지고 다시 한 번 이 과정을 반복한다. 이렇게 세 번의 과정을 거쳐 남은 24∼36개를 다시 4로 나누고 남은 수로 첫 효(爻)가 결정된다.

이 과정을 6번 반복해야 1괘(卦)의 6효가 결정되고 그에 따라 괘의 상(象·모양)과 변(變·변화), 괘와 효의 사(辭·설명)을 참고해 판단하게 된다. 이것은 ‘주역’의 시초점(蓍草占)이다. 그런데 이 복잡한 과정을 거쳐 괘가 결정돼도 ‘주역’의 설명은 해독조차 어렵다.

그렇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 가다듬어 단순명료해진 마음이면 이제 스스로 판단해도 된다. ‘주역’을 열심히 연구했던 주희도 실제로 자기 일에 점을 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김형찬 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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