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정갑영/'디지털세상'을 준비하자

  • 입력 2000년 1월 23일 19시 12분


까치발을 세우고 눈높이를 맞추며, 온도계의 빨간 수은주를 읽던 때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틀릴까 조바심하며 시린 손으로 기온을 적던 그 시절에는 정보가 바늘이나 색깔로 표시되었다. 시간과 속도, 심지어는 급한 전보도 모스 부호처럼 길고 짧은 아날로그 신호로 전달되었다. 아날로그 정보는 불명확하기 때문에 까치발의 높이에 따라 기록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상을 숫자로 정확하게 변환시킬 수 있는 디지털 기술이 도입되면서 세상은 정말 편리하고 경이롭게 변화하고 있다. 다른 세계로 향하는 창을 열어주고, 그 창을 통해 보여주는 세상이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처럼 신비롭게 다가오고 있다. 루이스 캐럴이 아니라 디지털이 만들어 내는 21세기 앨리스의 나라이다.

0과 1이라는 이진수로 정보를 표현하는 디지털 기술은 세상을 빛의 속도로 변화시키고 있다. 디지털은 기업과 사람들을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가상세계에서 살게 하고 있다. 그 거미줄 망(www) 속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서로 생산하고 교환하며 분배하는 가운데 디지털 경제가 생성되고 있다. 아직은 용어조차 정리되지 않아 인터넷 경제나 웹 경제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물론 변화는 경제뿐이 아니다. 일하고 놀며 움직이고 생각하는 모든 패러다임이 새롭게 바뀌고 있다. 디지털에 익숙지 않은 컴맹세대의 문화적 충격도 엄청나다. 가까이 하고 싶지만 너무나 멀리 있어서 다가갈 수 없는, 그러나 피할 수도 없는 디지털의 세계에서 소외된 망연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혹자는 디지털 경제를 전자 상거래로 한정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미 성장의 속도가 모든 예상을 무색케 하고 있다. 불과 4년만에 인터넷 가입자가 5000만명을 돌파하여, 38년이 걸린 라디오나 18년의 PC보다 훨씬 더 폭발적이다. 우리도 벌써 1000만명을 넘어섰고, 사이버 주식거래는 40%로 세계 수위를 다투고 있다. 일본의 ‘야후!’처럼 10억원짜리 주식은 없지만, 코스닥에서는 수백억원을 동원하는 벤처기업도 많아졌다.

거품논란속에서도 N세대의 젊은이들이 안정된 직장을 떠나 디지털 세계로 탈출해 ‘.com’과 ‘e-’가 붙는 사업에 뛰어 들고 있다. 디지털 경제는 이제 역류할 수 없는 새 천년의 패러다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열광시키고 있는가. 디지털의 패러다임은 시공을 초월한 무한한 가상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경쟁력의 원천이 자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창의력에 달려있다는 사실도 희망에 부풀게 한다. 마이크로소프트나 야후의 성공요인이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또한 기업을 움직이는 핵심역량이 조직보다는 각 개별주체라는 것도 매력적이다. 그래서 관료나 기업조직도 작은 것이 아름답고 효율적이며, 부처별 기능이 통합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그러나 어느 세상에 좋은 기회만 있겠는가. 디지털의 세계에도 위험은 상존한다. 성장의 잠재력이 모든 기업에 수익성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대량의 정보를 빛의 속도로 전달하며, 많이 생산할수록 비용이 낮아지는 수확체증도 나타난다. 그래서 표준화를 실현시키는 하나가 모든 시장을 독점하는 슈퍼 스타로 부상한다. 거대기업간의 제휴와 합병이 유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단순한 PC의 보급이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고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켜 빛의 속도에 걸맞은 생각의 틀을 갖도록 해야 한다.

모든 제도와 정책을 디지털 경제에 걸맞게 바꾸고, 신경제의 효율성이 극대화될 수 있는 디지털 기반을 넓혀나가야만 할 것이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컴맹 세대의 소외에도 사회적 관심도 필요하다.

그래서 지도층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이 디지털의 창에 까치발을 세워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도록 하자.

정갑영<연세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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