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성희]정치인과 바둑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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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개로왕이 바둑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말을 듣고 고구려 장수왕은 도림 스님을 백제로 보낸다. 바둑으로 개로왕에게 접근한 도림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도록 부추긴다. 이로 인해 백성이 궁핍해진 틈을 타 장수왕은 475년 백제를 치고 개로왕은 도망치다 죽임을 당한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바둑의 매력이 국력도 쇠하게 할 만큼 치명적임을 보여준다.

▷정치인 가운데는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이승만,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각각 명예9단과 명예8단이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박정희 대통령과 5·16군사정변을 일으켰을 당시 노출을 피하기 위해 서울 남영동 일대 기원을 다니며 마음을 다스렸다. 자신의 호를 딴 운정(雲庭)배 바둑대회를 만들 정도로 바둑광인 그는 오자와 이치로 일본 자유당 당수와의 바둑 대결로 반상(盤上)외교도 펼쳤다.

▷현역 정치인 가운데 최고 고수는 아마 6단의 이인제 새누리당 의원이다. 아마 5단인 원유철 원내대표는 국회기우회 회장인데 조훈현 9단의 비례대표 영입이 그의 작품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바둑 사랑도 유명하다. 바둑을 배우고 싶었던 대학생 안철수는 바둑 관련 서적 50권을 독파한 후 아마 10급 친구와 대국했는데 9점을 깔고도 100집 이상 졌다고 한다. 이론과 실전의 냉혹한 차이를 맛봤던 셈이다. 아마 3단의 실력파지만 안 대표는 바둑이 시간을 많이 빼앗는 취미라는 이유로 끊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첫 대국이 벌어진 9일 원 원내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등 많은 정치인이 대국장을 찾았다. 알파고의 첫 승리에 “공천관리위원장 맡기면 좋겠다”는 얘기도 나온다. 바둑과 정치는 수싸움이라는 측면에서 닮은 점이 많다. 포석, 초읽기, 자충수, 장고(長考) 끝의 악수(惡手) 등 정치 기사에서 쓰는 단어의 상당수가 바둑에서 빌려온 것이다. 상대는 패하면 피해가 큰데 자신은 패해도 별 피해가 없는 것을 의미하는 꽃놀이패도 바둑에서 유래했다. 바둑의 도(道)는 승패에 있지 않고 상생(相生)에 있다. 우리 정치권에서 가장 필요한 정신이 바둑에 담겨 있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바둑#정치#이세돌#알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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