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0 성난 이유’ 정치권은 벌써 잊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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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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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보선서 탄핵 받고도 FTA합의 종잇장뒤집듯 파기…자성은커녕 퇴행적 행태 보여

“이게 뭡니까… 회의 좀 합시다” 한나라당 소속 남경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왼쪽에서 세 번째)이 1일 국회 외통위 회의장 문을 막고 서 있는 야당 의원들에게 “회의장 점거를 풀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왼쪽부터 민주당 유선호 김동철 의원, 남 위원장, 민주당 최재성 의원.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이게 뭡니까… 회의 좀 합시다” 한나라당 소속 남경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왼쪽에서 세 번째)이 1일 국회 외통위 회의장 문을 막고 서 있는 야당 의원들에게 “회의장 점거를 풀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왼쪽부터 민주당 유선호 김동철 의원, 남 위원장, 민주당 최재성 의원.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성난 2040’에 사실상 탄핵을 받은 제도권 정치가 자성과 혁신은커녕 1980, 90년대식 ‘극한투쟁’으로 회귀하는 퇴행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를 둘러싸고 여야의 협상 채널이 마련한 합의안이 길거리 투쟁과 회의장 점거 등으로 폐기됐다.

무소속 박원순 서울시장의 당선은 여야 정치권에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 국민과의 소통, 대화와 타협 같은 정치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선거 이틀 뒤인 지난달 28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등 30여 개 시민단체가 결성한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가 국회 앞에서 집회를 열고 경찰이 물대포를 동원해 진압하는 등 길거리에서 물리적 충돌이 빚어진 뒤 한국 정치는 협상과 토론이 무력화된 ‘정치적 블랙아웃(blackout)’ 상태로 치닫고 있다.

여야는 지난달 29, 30일 한미 FTA 비준동의안 처리 문제를 놓고 마라톤 협상을 벌였다. 한나라당 황우여, 민주당 김진표 원내대표는 지난달 31일 새벽 가까스로 농수축산업과 중소상공인 피해보전 대책 마련에 합의하고 최대 쟁점인 투자자 국가소송제도(ISD)에 대해서도 FTA 발효 이후 한미 양국이 협의하도록 하는 내용의 절충안을 도출해냈다.

그러나 협상안은 그날로 없던 일이 됐다. 민주당은 당일 아침 의원총회에서 “ISD는 반드시 폐기해야 한다”며 합의안에 퇴짜를 놨다. 민주노동당은 ‘야권연대’를 내세워 민주당을 압박했다. 이후 민주당, 민주노동당 의원 30여 명은 FTA 주무 상임위원회인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회의장으로 몰려갔고 남경필 위원장은 질서유지권을 발동해 국회 경위 30여 명을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국회 사무처의 P 경위가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과 충돌해 머리에 상처를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국회가 우왕좌왕하는 동안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은 국회 밖에서 맞붙었다.

소설가 이외수 씨,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 이른바 진보 진영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오피니언 리더들은 트위터 등에 FTA 반대 글을 올렸다. 한국에서 팔로어가 가장 많은(99만여 명) 이 씨가 트위터에 “한미 FTA로 너무 많은 것을 잃게 된다”(지난달 31일)고 쓰자 이는 실시간으로 퍼져 나갔다.

이에 맞서 보수성향의 ‘대한민국 지킴이연대’라는 단체는 1일 국회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익은 뒷전으로 미루고 당리당략만 일삼고 있다”며 “야권이 한미 FTA로 내년 총선, 대선에서 반사 이익을 노린다면 강력한 국민적 저항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여야 협상이 종잇장 뒤집듯 무참히 파기되고 국회 내 회의장이 농성장으로 바뀌는 일련의 과정은 ‘성난 2040’의 기성정치 혐오증을 심화시켜 정당 정치의 위기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특임장관실이 윤원철 한양대 경제금융대 교수에게 의뢰해 20∼39세 1202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4%가 ‘나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당이 없다’고 답했다. 정당을 선호하지 않는 이유로는 △‘정당제도의 실효성 의문’(38.5%) △‘정쟁만 키운다’(29.1%) △‘나의 이해와 무관하다’(27.7%)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야 협상의 전권을 갖는 원내대표는 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이 2003년 “원내정당화를 지향하겠다”며 ‘정치 업그레이드’ 차원에서 만들어 정착시킨 직제(과거엔 원내총무)지만 원내대표 간 협상이 백지화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협상 기능이 계속 무력화되면 ‘정치권에 맡겨봐야 되는 일이 없다’는 비아냥거림만 키우고 정당 기능 악화로 연결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야는 1일 협상 불발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데 급급했다.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는 “민주당 손학규 대표가 번번이 원내대표의 합의를 무산시키고 있다”고 주장했고, 민주당 김진표 원내대표도 “이명박 대통령이 3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한테서 ‘ISD 재협상을 하겠다’는 확답을 받아 와야 처리에 응할 수 있다”고 했다.

민주당 등 야당은 외통위 회의실을 점거해 한나라당의 강행 처리 가능성에 대비했다. 외통위 회의실이 위치한 국회 본청과 국회 출입문 주변엔 수백 명의 경찰이 하루 종일 배치됐다. 2008년 12월 ‘해머 폭력’으로 국제적 망신을 자초했던 외통위 회의장에는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타협과 대화를 확신하지 못하는 여의도 국회의 모습. 유권자들의 마음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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