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시민, ‘제3의 길’에 레드카드… 무능 중도좌파에 등돌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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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없는 사민계열 정당 추락

“민주당 조타수였던 나는 대표직에서 물러납니다. 중도좌파 그룹은 이제 새로운 야당의 페이지로 넘어가야 합니다.”

5일 오후 이탈리아 총선 투표 마감 후 18시간이 지나서야 힘겹게 대중 앞에 선 마테오 렌치 전 총리는 총선 패배를 인정하고 당 대표직에서 사퇴했다. 2014년 40%의 지지율을 얻으며 화려하게 집권했던 그는 이번 총선에서 역대 최저 득표율인 18.9%를 기록하며 정권을 내줬다.

마지막 남은 이탈리아마저 정권을 뺏기면서 유럽 주요 5개국(독일 프랑스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중도좌파 성향의 사민계열 정당이 집권한 곳은 한 곳도 없게 됐다. 유럽연합(EU) 회원 28개국으로 범위를 넓혀도 사민계열 정당이 정권을 잡은 국가는 5개국(몰타 루마니아 포르투갈 슬로바키아 스웨덴)뿐이다.

최근 EU 전문매체인 EU옵서버 조사에 따르면 21세기 들어 유럽 주요 17개국 중 15개국의 사민계열 정당 지지율이 떨어졌다. 사민계열 정당의 몰락은 여러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 패배의 정도는 정당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하다.

지난해 치러진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 체코 선거에서 사민계열 정당이 모두 완패했다. 선거 결과가 나올 때마다 붙었던 단골 수식어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패배’였을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한때 집권당이었던 네덜란드 노동당과 프랑스 사회당은 득표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었다.

19세기 말 자본가 계급에 저항하는 노동운동과 결합하면서 시작된 150년 역사의 유럽 사민계열 정당들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자본주의의 장점을 결합한 ‘제3의 길’을 도입해 집권했던 독일 사민당 게르하르트 슈뢰더, 영국 노동당 토니 블레어 총리 때가 마지막 전성기였다.

독일의 저명한 정치학자 알브레히트 폰 루케는 “독일 사민당은 아직도 슈뢰더 노동개혁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슈뢰더 총리가 고용과 해고를 쉽게 하는 우파적 해법을 도입해 단행한 노동개혁은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을 높여 지금의 독일 경제 호황의 기반이 됐다. 하지만 사민당에는 악몽의 시작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2005년 정권을 내준 이후 사민당은 아직 집권하지 못하고 있다.

유럽 사민계열 내에서는 “‘제3의 길’은 적당히 자본주의와 타협하면서 노동계층을 시베리아 벌판으로 내모는 결과를 낳은 지지층에 대한 배신행위”라는 시각이 많다. 사민계열 정당 지지자들이 극좌 정당들로 향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를 의식한 제러미 코빈 영국 노동당 대표는 ‘제3의 길’에 부정적이다. 그는 부자들에게 부유세를 거둬 복지를 강화하는 노동당 본래의 좌파 성향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제3의 길은 20세기 복지국가가 한계에 봉착한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수십 년 동안 높은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교육 건강 연금을 국가가 책임져 주는 북유럽식 따뜻한 복지국가를 추구했던 유럽 국가들은 1990년 들어 세계화와 무한경쟁 체제가 도입되면서 한계에 다다랐다. 과도한 복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국가 부채가 급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급격한 기술 개발로 사민계열 정당의 전통 지지계층인 블루칼라의 수가 급감하고 대형 노조의 힘이 약해졌다. 그사이 중산층으로 올라간 계층은 우파로, 빈곤층으로 전락한 계층은 극좌로 향했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는 결정타를 날렸다. 사민계열 정당이 집권한 국가마저 사회 불평등, 실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국민의 삶의 질이 떨어지자 이는 ‘기성 정당에 대한 불신’으로 퍼졌다. 독일 사민당의 청년모임 리더 케빈 퀴네르트는 “국민에게 좌우 할 것 없이 기성 정당은 적당히 친유럽형이고, 현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모두 똑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기성 정당에 대한 불신의 틈을 포퓰리즘 정당이 빠르게 파고들었다. 독일 좌파당, 스페인 포데모스, 이탈리아 오성운동 등 극좌 포퓰리즘 정당이 대표적이다. 마침 인권을 중시하는 사민계열 정당은 난민 수용에 관대했다. 2010년대 들어 난민 대거 유입으로 저소득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길 수 있다는 위협을 느끼게 됐고, 난민 수용에 비판적인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이 이 공포를 기반으로 득세했다. 난민에 대한 공포는 국가와 문화 정체성에 위협을 느낀 엘리트층까지 강타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사민계열 정당들이 아직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해 위기가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미 다음 달 헝가리 총선과 내년 폴란드 벨기에 선거 모두 사민계열 정당들의 득표 전망이 우울하다. 덴마크 사민당은 포퓰리즘 정당 인민당을 의식해 2015년부터 이민과 난민에 대해 비판적인 행보로 노선을 바꾸는 등 유권자들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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