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 위기 그리스를 가다]<2>“재정 파탄? 연금 잘 나와 못느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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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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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이종훈 특파원 르포

이종훈 특파원
이종훈 특파원
19일 늦은 밤 아테네의 ‘강남’으로 불리는 남부 해변가 글리파다 지구. 카페와 레스토랑, 술집, 나이트클럽 수백 개가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24시간 문을 여는 카페가 몰려 있는 일명 ‘카페 거리’는 꼬리를 물고 선 차들과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밤 12시부터 개점한 클럽과 극장식 술집의 대부분은 해가 뜨는 오전 5, 6시가 되어야 문을 닫는다. 나라는 1년 만에 또다시 부도위기에 몰려 있지만 이곳은 전혀 다른 신세계다.

카페에서 만난 “아버지가 의사”라고 밝힌 대학생 마리오 씨(23)는 “아테네 중심가에 살지만 주말이면 친구들과 이곳에 와서 함께 즐긴다”며 “경제위기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옆 테이블에 앉은 미네로스 씨(66) 부부는 한 달에 받는 연금이 둘이 합쳐 대략 3600유로(약 560만 원)라고 했다. 남편은 해운회사에서, 부인은 제약회사에서 일하다가 퇴직했다고 한다. 미네로스 씨는 경제위기에 대해 “정치인과 공무원이 잘못한 결과다. 하지만 내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어 얼마나 큰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인구가 1100만 명에 불과한 그리스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만 달러에 가까운 사실상 선진국. 하지만 사회 밑바닥에서는 과연 국가라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나 의심이 들 정도로 상식에서 벗어난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다. 대표적인 게 계층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퍼져 있는 탈세와 뇌물이다.

그리스에서는 집이나 건물을 새로 짓거나 살 때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실제가와 별개로 이중계약서를 만드는 게 당연한 것처럼 돼 있다. 이뿐만 아니다. 19일 아테네 중심가 신타그마 광장에서 만난 한 실직자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지난해까지 무역회사에서 일했다는 그는 “회사가 3분의 2를 내고 개인이 3분의 1을 내는 연금 납부금을 줄이기 위해 회사와 직원이 합의하에 소득을 실제보다 낮게 신고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내가 다니던 회사도 그랬다”면서 “탈세를 적발한 세무서 직원이 벌금을 줄여주는 대신 뒷돈을 받는 일도 허다하다”고 말했다.

20년 가까이 아테네에 거주하는 교민 김모 씨는 “지난해 말 이웃집 친구가 임신을 해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특별히 잘 돌보아주겠다’며 웃돈을 요구했다. 그리스 병원에서는 의사가 노골적으로 환자에게 ‘별도의 돈’을 요구하는 일이 종종 있다”며 “이처럼 일상생활 도처에서 뇌물이 판을 치니 그리스는 돈과 인맥이 최고라는 인식이 팽배하다”고 말했다.

그리스의 불법 탈세액이 연간 300억 유로(약 47조 원)에 이른다는 추정도 있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리스가 지난해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받은 구제금융(1100억 유로)의 4분의 1이 넘는 규모다. 실제로 지난해 탈세 문제로 국가와 회사, 또는 민간인이 벌이고 있는 소송이 수만 건에 이른다는 유럽언론들의 보도도 있었다.

관료 부패도 극심하다. 터키와 군비 경쟁을 하고 있는 그리스가 지난해 독일에서 잠수함 4척을 주문하는 과정에서 관리 여러 명이 독일 군수업체에서 최소 수백만 유로의 뇌물을 받은 혐의가 포착됐다. 그리스 언론은 “이 뇌물은 관료는 물론 정치인에게까지 전달된 정황이 있고 액수도 최대 1억 달러에 이를 수 있다”고 보도했지만 정작 국민의 반응은 “뭐 새로울 게 있느냐”라는 식이다.

해운업체에 대한 법인세 부과가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 해운업은 그리스 GDP의 10%를 차지하는 경제의 주동력이지만 그리스에서 유일하게 법인세를 내지 않는 업종. 한때 정부가 과세를 추진하기도 했으나 “그리스를 떠나겠다”고 협박한 해운업체들과 관련 정치인 입김에 가로 막혔다.

관료주의의 폐해도 만연하다. 지난주 그리스 언론에는 아테네 국립 고고학박물관에 ‘앤티키데라’라는 인류 최초의 컴퓨터를 보러 온 한 미국 학생의 사연이 실렸다. 이 학생은 “어렵게 돈을 모아 미국에서 보러 왔는데 전시룸이 닫혀 있다”며 “제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소연을 했다는 것. 알고보니 박물관 측은 예산 축소로 사람이 줄었다며 전체 전시룸의 3분의 1만 열어놓고 있었다.

KOTRA 윤강덕 아테네센터장은 “역사적으로 도시국가로 출발한 그리스는 로마의 지배를 1000년, 터키의 지배를 400년 받으며 국민들의 국가관이 희박해졌다는 학계의 분석이 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오랜 기간 포퓰리즘에 길들여져 ‘나만 좋으면 상관없다’는 식의 극도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점”이라며 “국민 스스로 자립 의지가 없는데 누가 그리스를 돕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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