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日本 대지진]잔해 치울때마다 시신… 대피소가 영안실로 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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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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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명 행방불명 미나미산리쿠

황태훈 기자
황태훈 기자
《 생각하고 싶지 않던 우려가 현실로 바뀌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마을이 초토화되고 전체 인구 1만8000명 중 60%에 이르는 1만500명가량이 실종됐던 미야기(宮城) 현 해안 마을 미나미산리쿠(南三陸)에서 14일 1000여 명이 한꺼번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미야기 현 재해대책본부는 이날 이 마을 해변에 널려 있는 시신 1000여 구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시신들은 폐허가 된 건물 잔해와 함께 휩쓸려 바닷가까지 밀려왔다가 바닷물이 빠지면서 잔해와 진흙을 걷어내자 갯벌에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오시카(牡鹿) 반도 해안에서도 이날 시신 약 1000구가 발견됐다. 실종된 주민들이 연락만 두절됐을 뿐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미야기 현 지사도 “미야기 현에서 1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며 전날 미야기 현 경찰본부장이 한 발언을 재확인했지만 미야기 현 전체가 아니라 미나미산리쿠에서만 사망자가 1만 명에 이를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4일 오전 9시 동아일보 취재팀은 미야기 현 센다이(仙臺) 시에서 미나미산리쿠로 연결되는 센다이 고속국도에 진입했다. 그러나 경찰은 “센다이 시에서 미나미산리쿠로 가는 국도 4호선은 물이 차서 통행이 불가능하다. 다른 우회 도로가 있지만 길 및 다리가 끊어지거나 추가 지진으로 붕괴될 위험이 있어 역시 갈 수 없다”며 돌아가라고 했다. 전날까지는 취재진과 구조 및 구호차량에 한해 통행이 허용됐던 길이다.

전날 미나미산리쿠에 서구 언론 가운데 처음 발을 디딘 영국 채널4 뉴스의 30년 베테랑 기자 알렉스 톰슨 씨는 “과장이 아니다. 마치 1945년 8월 6일 피폭 직후의 히로시마를 찍은 사진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세계 각지 전쟁과 무력분쟁, 주요 대지진 현장을 수십 차례 취재했다는 톰슨 기자는 “(하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이렇게 황폐화한 모습은 결코 본 적이 없다”며 몸서리를 쳤다.

그가 전한 미나미산리쿠는 침묵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울음도, 분노도, 히스테리도 없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일본인답게 슬픔을 속으로 삭이며 조용히 기다렸다. 바닷가 마을에서 내륙으로 약 6.5km 지점까지 95%가 잿더미로 변했다. 건물들은 단순히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뼈대를 이뤘던 철근은 휘었고 목재들은 톱밥처럼 변해 있었으며 벽돌과 콘크리트는 산산조각이 났다. 남아 있는 건물이라야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자위대원들이 잔해를 뒤져 시신을 찾아내 언덕 위에 있는 시즈가와 초등학교로 옮겼다. 지진과 지진해일(쓰나미)이 덮치던 날 대피소로 쓰였던 학교 체육관은 이제 영안실로 변했다.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이 학교와 맞은편 언덕으로 7000∼8000명이 피신했다. 영어교사 사키 신지 씨는 “쓰나미 경보 사이렌이 울리자 사람들이 차를 몰거나 뛰어서 이 언덕으로 모여들었다. 곧이어 거대한 쓰나미가 마을을 삼키는 걸 지켜봤다”며 “당시 심정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사키 씨는 “쓰나미에 쓸려가는 집 지붕 위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을 공무원인 다카하시 조신 씨는 14일 미국 CNN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거동이 불편한 노인과 장애인을 집 2층에 남기고 온 집이 많다. 그들은 아마도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안과 가까운 곳에 있던 5층짜리 시즈가와 병원에서는 환자 110명 가운데 30명만이 살아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 의료진은 지진이 발생해 건물이 심하게 흔들리자마자 환자들을 들쳐 업고 3층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30분 뒤 쓰나미가 들이닥쳤다. 바닷물은 3층까지 차올랐다. 환자들을 등에 업고 의료진은 5층으로, 옥상으로 계속 올라갔다. 환자 9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고 나머지 70여 명은 쓰나미에 쓸려간 것으로 보인다. 옥상에 있던 이들은 13일 자위대 헬리콥터에 겨우 구조됐다.

미나미산리쿠 행정사무소와 소방서, 경찰서도 모두 휩쓸렸다. 11일 당시 행정사무소 3층에서는 마을의 노인 100여 명이 참석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고 한다. 쓰나미가 닥치자 이들은 옥상으로 대피했다. 그러나 쓰나미는 건물 옥상까지 휩쓸고 지나갔다. 사투 끝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사토 히토미 미나미산리쿠 정장(町長·행정책임자)은 “우리 주민들은 매년 5.5m 높이의 쓰나미에 대비하는 훈련만을 했다. 이번처럼 상상을 불허하는 쓰나미가 닥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역시 겨우 목숨을 건진 마을 공무원 이와부치 다케히사 씨는 기자들에게 “부디 이곳의 참상을 알려주세요. 사람들이 아직도 폐허 밑에 있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한편 이 마을 공무원인 엔도 미키 씨(25·여)는 11일 3층짜리 마을사무소 방송실에서 쓰나미가 코앞에 닥치는데도 “고지대로 대피하십시오”라는 방송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방송을 듣고 많은 주민이 목숨을 건졌지만 엔도 씨는 쓰나미에 휩쓸리고 말았다. 14일 구조대가 아무리 뒤져도 엔도 씨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후쿠시마=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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