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이면 책 만드는 세상, 누구나 작가 될 수 있죠”

  • 입력 2009년 2월 5일 02시 45분


美 ‘셀프 출판’ 나홀로 호황

일반인 책 제작 붐 타고

전문업체 수익 크게 늘어

메이저 출판사서 재출간

50만달러 판권받은 책도

미국 하버드대 출신의 신경과학 박사 리사 제노바(38) 씨는 졸업 후 제약회사 컨설턴트로 일했다. 소설가의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틈틈이 쓴 소설 ‘스틸 앨리스(Still Alice)’의 원고를 들고 출판사 문을 두드렸다. 2007년까지 100여 곳의 출판사에 문의했지만 한 곳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셀프 출판(Self Publishing)’을 하려고 아이유니버스를 찾았다. 스스로 책을 내려는 저자들에게서 원고를 받아 책을 만들어주는 회사다. 이 출판사는 저자의 요청에 따라 편집, 디자인 전문가들과 연결해주거나 아마존닷컴을 비롯한 온라인 서점을 통해 판매를 대행한다.

제노바 씨가 450달러를 들여 출판한 이 책은 꾸준히 팔렸고, 메이저 출판사인 사이먼앤드슈스터 관계자의 눈에 띄어 50만 달러에 판권이 팔렸다. 이 책은 지난달 중순 재출간되자마자 뉴욕타임스(NYT)의 ‘페이퍼백 소설’ 베스트셀러 5위에 올랐고 시사주간지 타임과 NYT 등은 제노바 씨의 사례와 더불어 셀프 출판의 현황을 상세히 소개했다.

NYT는 “셀프 출판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출판 불황 속에서도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이유니버스의 모기업인 오서솔루션은 지난해 1만3000종을 출판했다. 2007년보다 12% 늘어난 것으로 랜덤하우스가 출판한 종수의 4배를 넘는다. 블럽이라는 셀프 출판사의 수익은 2006년 100만 달러에서 지난해 3000만 달러로 증가했다.

출판시장 조사업체인 바우커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 출판된 신간 종수는 2006년 29만 종에서 2007년 41만 종으로 급증했다. 바우커는 셀프 출판의 비중이 커졌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했다.

이런 경향은 우선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블로그를 비롯해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NYT는 “사람들은 누구나 책 소재를 한두 가지는 갖고 있다”면서 “책을 쓰려는 사람이 읽으려는 사람보다 더 많은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셀프 출판 안내서를 쓴 제이슨 리치 씨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편집과 인쇄가 간단해지면서 책을 만들어 내는 게 1시간 내에도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완성된 책을 파일 형태로 보관하다가 주문량만큼만 책을 찍는 프린트온디맨드(POD·Print On Demand) 방식은 재고관리 비용을 줄였다.

셀프 출판의 활성화는 출판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전조로도 해석된다. 미국식 셀프 출판사와 비슷한 에세이퍼블리싱을 운영하는 손형국 대표는 “출판사가 기획해서 책을 만든 뒤 일정량을 찍어 무조건 시장에 내놓는 공급자 마인드의 출판 방식으로는 갈수록 세분되는 독자들의 관심사를 충족시키기 어렵다”면서 “소량이더라도 다양한 종류의 책이 나와야 하는데 셀프 출판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선 셀프 출판을 통한 성공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변호사 짐 벤뎃 씨가 역대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얽힌 일화를 모아 2000년 셀프 출판한 ‘데모크라시스 빅 데이(Democracy’s Big Day)’는 꾸준히 팔리고 있다. 중소기업 컨설팅 전문가 미셸 롱 씨는 지난해 컨설팅 책을 셀프 출판해 지금까지 2000부 이상 팔았다.

한국에서도 셀프 출판을 돕는 출판사가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 미국만큼 체계를 갖추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손 대표는 “편집과 제본, 인쇄는 물론이고 판매와 사후관리까지 연계하는 미국식 셀프 출판 방식에 못 미치는 출판사가 많다”면서 “미국과 한국의 시장 규모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국내에서 셀프 출판되는 책의 종수나 판매량 역시 미국에 크게 못 미친다”고 말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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