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10월혁명 90년]<하>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오늘

  • 입력 2007년 10월 26일 03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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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델링 된 국영공장 러시아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에선 과거 사회주의 혁명의 흔적이 하나 둘씩 지워지고 있다. 시민들이 25일 자본주의가 도입된 후 리모델링한 국영공장 옆을 지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정위용 특파원
리모델링 된 국영공장 러시아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에선 과거 사회주의 혁명의 흔적이 하나 둘씩 지워지고 있다. 시민들이 25일 자본주의가 도입된 후 리모델링한 국영공장 옆을 지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정위용 특파원
‘자본주의 찬가’ 부르는 혁명군의 후예들

《러시아 10월혁명 기념일(율리우스력으로 10월 25일·양력 11월 7일)을 13일 앞둔 25일 오후 상트페테르부르크 바실리 섬 공장지대의 스레드니 거리를 찾았다. 이곳은 10월혁명 당시 노동자들이 공장 앞문과 도로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장기 파업과 정치 투쟁을 벌였던 곳. 10월혁명 이후 90년이 지난 이날 도로에서 만난 노동자 10명은 모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근로 체계를 비교해 달라’는 질문에 “사회주의는 낡은 이념의 껍데기에 불과하다”며 사회주의에 ‘X’자를 그었다.》

특히 50대 후반이 지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모두 겪은 고령의 노동자들은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예찬론자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 노동자를 고용한 외국인 기업주들은 사회주의의 희미한 그림자를 여전히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90년간 굴러온 비효율적인 노동 시스템과 관행이 공장 일부에 남아 젊은 노동자들의 근로 의욕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귀띔했다.

▽혁명 노동자 후예의 자본주의 찬양=이날 오후 5시가 되자 바실리 섬 공장지대의 키오스크(가판점)에는 작업을 끝내고 귀가하려는 노동자들이 몰려나왔다.

퇴근 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있는 국영기업 노동자들로, 1905년 1차 혁명 당시 한 달 이상 장기간 제정러시아 군대와 대치했던 노동자의 후예들이다.

20년간 도로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한 노동자에게 “사회주의 시절이 그립지 않으냐”고 물어 봤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나는 TV 한 대가 750루블 하던 1980년대 초 공장장과 맞먹는 월 3000루블의 월급을 받은 특권 노동자였다. 하지만 국가의 발전을 보장하는 자본주의 근로조직이 10배 더 낫다.”

국영기업 노동자들의 자본주의 선호는 그들이 겪은 사회주의에 대한 반발 심리와 맞닿아 있는 듯했다. 한결같이 “국가가 주는 할당량만 채우고 월급도 똑같이 나눈 시절이었지만 그런 체제로 사회주의가 망해 노동자들이 힘들어졌다”고 대답했다.

나이 들어 사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근로 체제를 비교하며 자신의 견해를 자신 있게 밝혔다.

자동차 부품업체에서 일하는 비탈리 테마페예비치(60) 씨는 “요즘 젊은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말기 집단적 빈곤을 경험하지 못해 잘 모른다”며 사회주의 생산체제의 비효율성과 자본주의의 장점을 얘기했다.

그는 “소련 시민들이 일한 만큼 보상받으며 장기간 일할 수 있는 조직은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공장이라는 점을 깨닫는 데 70년 이상이 걸렸다”고 말했다.

40세 미만의 젊은 근로자들은 러시아에 자본주의가 도입된 이후 일자리가 많아진 상황을 반기고 있었다.

조립공으로 일하는 블라디미르 미냐예비치(39) 씨는 “사회주의 때는 군수 분야를 빼곤 평생을 바쳐 일할 자리가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원하면 얼마든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혁명군에서 산업 역군으로=스레드니 거리에서 100m 떨어진 19리니 거리에 있는 한 선반공장은 오후 7시가 넘었는데도 강철을 깎는 기계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돌로 만든 공장 정문에 새겨진 ‘1910년 설립’이라는 표지만이 10월혁명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건물 옆에서는 비즈니스센터로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었고 공장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선박에서 나온 강철을 다듬느라 비지땀을 흘렸다.

공장장 세르게이 시묘노비치(59) 씨는 “지난해 생산량과 품질에 대한 인센티브제를 적용한 뒤 매출이 30% 올랐다”고 자랑했다. 혁명군을 조직해 10월혁명의 하부 조직으로 활동했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도입 후 러시아 경제를 떠받치는 산업 역군이 됐다는 것이다.

올해 제조업 활황으로 산업 성장률이 급신장하고 있다는 러시아 정부의 발표가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러시아의 제조업 성장률은 지난해 4.4%에서 올해 상반기 12.5%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제조업의 빠른 성장 덕에 국민총생산은 7%를 거뜬히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희미한 사회주의 그림자=러시아 공장은 사회주의를 이미 잊은 듯하지만 외부 관찰자들의 눈에는 그 고질적인 병폐가 앞으로도 상당 기간 남아 있을 것으로 보였다.

러시아 사장과 공동으로 용접기 제조공장을 운영한다는 한 프랑스인은 “입사할 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도 전에 월급 액수를 높게 요구하고 업무를 맡기면 책임을 회피하는 자세가 대표적인 사회주의 그림자”라고 말했다.

또 다른 외국인은 “공장이 아직 연금과 같은 복지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근로자들이 틈만 나면 일자리를 옮기려 한다”며 “사회주의의 무너진 복지 체제가 고용의 불안정성을 부추기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렇지만 러시아 공장주들은 “근로자들이 정치 파업을 일삼던 사회주의 향수병을 치유하고 생산성을 조금씩 높여 나가는 것을 보고 희망을 찾는다”고 말했다. 러시아 노동자의 파업 참여 인원은 혁명 당시 100만 명 단위에서 지난해 1000명으로 줄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 러시아 내년 대선 어떤 선택할까

‘강한 지도력’ 1순위 덕목 2순위는 ‘시장경제 지향’

러시아인들은 내년 대통령으로 ‘강력하고 시장지향적인 인물’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全)러시아여론조사센터(VCIOM)가 지난달 러시아인 1800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의 53%가 ‘강한 국가를 이끌 수 있는 인물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대답했다.

강력한 대통령에 대한 선호는 집권당인 통합러시아당과 러시아공산당 지지 층에서 특히 많았다.

이 기관이 지난해 실시한 조사에서도 러시인의 과반수는 ‘러시아에 힘 있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강한 대통령을 희망하는 비율은 18∼24세 연령층(53%)보다 60세 이상(63%)에서 더욱 높게 나타났다.

러시아 유권자들이 ‘강한 지도력’ 다음으로 선호하는 차기 대통령의 덕목으로는 시장경제 지향이 꼽혔다. 시장경제 지지자들은 중도 정당 지지층에서 많았다.

이번 조사에서 공산당 지지자는 응답자의 4%로, 지난해 두 자릿수 지지율에서 한 자리로 떨어졌다. 공산당 지지자의 6%도 “시장경제를 추진하는 대통령을 인정하겠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러시아 정치평론가 예브게니 민첸코 씨는 “1991년 12월 소련 붕괴 이후 잃어버린 국가 자존심 회복을 자신의 생계보다 중시하는 경향이 여전히 강하다”고 설명했다.

한편 ‘소련 시대에 나라를 가장 잘 이끈 지도자’ 1위에는 브레즈네프가 올랐다. 브레즈네프는 지난해에도 소련 지도자 가운데 선호도가 가장 높은 인물로 꼽혔다.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러시아에서 브레즈네프는 소련이 상대적으로 안정기를 구가할 당시 권좌에 올라 나라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브레즈네프에 이어 선호하는 소련 지도자는 사회주의 혁명 정부를 수립한 레닌이 2위, 스탈린이 3위였다. 그러나 레닌과 스탈린은 ‘러시아 혁명 이후 국가를 잘못 이끈 지도자’ 순위에서도 1, 2위에 올랐다.

시장 경제 도입을 주도한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지도자 선호도에서 최하위권을 차지했다.

1917년 사회주의 혁명 후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인 지도자를 묻는 질문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67%로 가장 높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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