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독일이 어쩌다가…

  • 입력 2003년 6월 12일 16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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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경제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서독은 노동자의 이익을 중시하는 ‘사회주의적 시장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자동차 기계 전기전자 및 화학 분야에서 미국을 추월하는 성과를 보였다. 당시 독일은 전후 폐허에서 반세기 만에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로 변신한, 명실상부 유럽을 대표하는 모범국가였다.

그러나 지금 독일은 유럽 경제의 ‘문제아’로 취급받는다. 90년대 중반 이후 독일의 국가경쟁력은 점점 약화돼 최근에는 세계 15위까지 밀려났다. 세계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뚜렷한 감소세인 데다 정보기술(IT) 등 첨단 분야의 수출경쟁력도 최악의 상태다. 96년 이후 독일의 연평균 성장률은 다른 유럽연합(EU) 회원국보다 낮은 1%대로 급락했다. 이는 미국에 비해서도 2%포인트가량 낮은 것이다. 국내총생산(GDP) 성장세의 급격한 둔화, 낮은 인플레이션, 그리고 정체 상태에 빠진 생산성 등으로 독일 경제는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왜 독일이 이렇게 침체의 늪에 빠진 것일까?

독일의 문제를 돌이켜보면 우선 한 국가 지도자의 선택이 국가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 수 있다. 89년 당시 서독의 헬무트 콜 정부는 옛 소련이 해체되며 동독에 주둔했던 소련 군대가 철수하자 기존의 점진적 통일 방안을 포기하고 동독을 일시에 흡수 합병하는 빅뱅(Big Bang)방식의 통일 정책을 선택했다.

이를 위해 서독이 내세운 조건은 두 가지. 하나는 독일연방은행의 권고를 무시한 채 동독 마르크를 서독 마르크와 1 대 1로 교환해 주기로 한 것. 다른 하나는 서독의 노동법 및 노사관계 기본 원칙을 그대로 동독에 적용함으로써 동독 근로자들의 임금을 1994년까지 서독 수준에 이르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콜 총리의 이런 정책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오늘날 독일 경제 쇠락의 주범으로 꼽히고 있다.

통일 전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의 환율이 4.3 대 1이었을 때도 동독 제품은 경쟁력이 없었다. 당시 실제로 시장에서 동독 마르크는 10 대 1의 비율로 서독 마르크와 교환되기도 했다. 이를 무리하게 1 대 1로 만들어 놓으니 동독 제품이 시장에서 제대로 된 가격 경쟁력을 가질 수가 없었다.

또 동독 근로자들의 임금도 당초 콜 총리의 약속에 따라 90년대 내내 생산성 증가율을 크게 웃도는 수준에서 결정됐다. 생산성보다 임금이 높으니 동독 기업들은 당연히 경쟁력을 잃어갔다. 통일 이후 기대됐던 서독 기업과 외국인의 투자도 동독 지역으로 더 이상 유입되지 않았다. 여기서 ‘경쟁력 약화→투자 감소→실업 증대→재정 악화→경쟁력 약화’라는 악순환의 고리가 독일 경제 전반에 걸쳐 형성됐던 것이다.

독일의 EU 가입도 독일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현재 독일은 통일에 따른 재정적자 누적으로 EU의 재정 건전화 협약(Stability and Growth Pact)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이 협약에 의하면 EU회원국은 재정적자가 GDP의 3%를 넘으면 자동적으로 재정긴축에 나서야 한다. 독일은 지금 이 협약을 지키기 위해 경기가 침체 상황인데도 재정을 긴축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는 것이다. 게다가 금리 정책 등으로 돌파구를 열어야 할 독일 중앙은행도 그 역할의 상당부분을 유럽중앙은행(ECB)으로 넘겨준 탓에 자국의 경제상황을 감안한 독자적인 정책을 내놓기 어려운 상태.

독일경제는 늙고 병들어가고 있다. 과다한 통일 비용 탓에 미래 고부가가치 산업육성을 위한 연구개발(R&D) 투자는 경쟁국에 비해 턱없이 적다. IT 및 바이오산업 경쟁력은 미국이나 영국에 크게 못 미친다.

현재 국제 금융권에서는 독일이 근본적인 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경제 회생이 어렵다고 보고 있다. 그들의 의견은 이렇다. 독일 기업은 이사회를 통해 노조의 경영 간섭을 배제함으로써 미래를 위한 투자를 증가시켜야 하고, 독일 정부는 사회보장관련 비용을 획기적으로 감축하는 과감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독일의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통일 문제를 대할 때는 ‘뜨거운 가슴’보다 ‘냉정한 머리’에, 노사 문제를 대할 때는 ‘분배와 평등’보다 ‘효율과 경쟁력’에 초점을 맞추는 지혜를 발휘해야겠다.

정문건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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