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만년 2인자’ 리펑 역사속으로

  • 입력 2003년 3월 10일 19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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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펑(李鵬·가운데)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이 공식 은퇴에 앞서 10일 전인대 회의에서 마지막 공작보고를 마친 뒤  젊은 대표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 -베이징〓AP 연합
리펑(李鵬·가운데)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이 공식 은퇴에 앞서 10일 전인대 회의에서 마지막 공작보고를 마친 뒤 젊은 대표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 -베이징〓AP 연합
10일 오전 중국 베이징(北京)은 진눈깨비가 쏟아지는 음울한 날씨였다. 속개된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마지막 공작보고에 나선 리펑(李鵬·75) 전인대 상무위원장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리 위원장은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를 중심으로 단결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업의 새로운 성과를 이루길 바란다”는 평범한 내용으로 1시간의 보고를 끝맺었다. 그리고 국무원 기구 개편안을 원안대로 통과시킴으로써 그의 직책을 다했다.

그는 이미 5일 전인대 개막일에 “나의 임무는 끝났다”며 공식 퇴진선언을 한 바 있어 이날 보고에 별도의 소회를 담지는 않았다.

리 위원장은 이른바 중국 정단(政壇)의 ‘홍색 명문’ 출신이다. 아버지 리숴신(李碩勳)은 1927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 등과 함께 난창(南昌) 봉기를 주도한 인물로 국민당에 체포돼 처형당했다. 어머니 자오쥔타오(趙君陶)는 1921년 저우언라이, 덩샤오핑(鄧小平) 등과 함께 프랑스 유학 중 중국공산당 유럽총지부를 결성한 자오스옌(趙世炎)의 여동생이다. 저우언라이의 상사였던 자오스옌은 1927년 상하이(上海) 정변 당시 국민당에 피살됐다.

이런 인연으로 리 위원장은 자녀가 없었던 저우언라이, 덩잉차오(鄧潁超) 부부의 양자가 됐고 1948년 이들 부부의 주선으로 구 소련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가 1983년 부총리에 이어 1989년 총리로 승진할 수 있었던 것도 덩잉차오가 “나의 아들은 안심할 수 있다”며 원로들에게 적극 추천한 덕이었다.

태자당의 전형적 인물로 고속 승진을 거듭해온 그였지만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전까지만 해도 그는 중국 인민들에게 그저 평범한 인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그는 국내외적으로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무능한 정치인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당시 리 총리는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와 사사건건 대립하며 덩샤오핑에게 강경 진압을 건의했었다.

그는 자오쯔양의 실각으로 내심 1인자인 국가주석직을 바랐으나 덩에 의해 버림받았다. ‘톈안먼 학살의 주범’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던 데다 개혁개방 노선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로 판단됐기 때문이었다. 1997년 전인대 상무위원장이 된 뒤에도 그는 가족의 부패 문제와 총리 시절 그가 직접 관여한 샨샤(三峽)댐의 공사 책임자들이 줄줄이 수뢰 혐의로 구속돼 구설에 올랐다.

이런 부정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리 위원장을 아는 주변 인물들은 그가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어서도 밤늦게까지 일하는 등 대단히 성실한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오랜 영욕을 거친 그가 지나치게 인색한 평가 속에 역사 속으로 쓸쓸하게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위기 역시 베이징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베이징=황유성특파원

ys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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