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정부는 9·11테러 이후 이슬람권의 반미감정이 고조된 가운데 처음으로 이슬람 신도들이 대거 모이는 행사인 점을 감안해 반미(反美)시위 등 불상사를 막기 위해 치안병력과 보안요원 등 6만여명을 배치하는 등 초비상 상태에 들어갔다. 메카 상공에는 헬기들이 감시비행에 나섰으며 성지 곳곳에 2000여대의 무인카메라를 설치했다.
나예프 빈 압델 아지즈 내무장관은 순례자들에게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데 전력하라”면서 “종교의식을 정치 이슈화하는 것을 참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우디 당국은 17일까지 세계 160여개국에서 134만명의 이슬람 신도들이 입국한 것으로 집계했다. 하지만 현지 언론은 신도들이 계속 몰려들고 있어 20일까지 최고 250만명이 참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특히 이번에는 과도정부가 들어선 아프가니스탄 순례객들의 입국이 눈길을 끌었다. 사우디와 파키스탄, 영국 등은 수송기를 동원해 하지 비자를 받은 아프가니스탄인 1만2500여명을 입국시켰다.
이 밖에 메카에는 인도네시아(20만명)를 비롯해 파키스탄(13만명), 인도(11만여명), 터키(9만명), 이집트(8만8000명) 등에서 온 150여만명의 외국인 순례객이 머물고 있는 것으로 추산됐다. 그동안 하지 기간에는 워낙 많은 순례자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압사사고와 화재 등 각종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의 의미와 기간은…▼
하지는 이슬람 신도가 지켜야 할 5대 의무 가운데 하나로 성지 메카를 일생에 한번 이상 순례하며 정해진 의식을 치르는 것을 뜻한다. 순례기간은 이슬람력 12월8∼12일이며 올해는 2월20∼24일에 해당한다.
순례자들은 이 기간에 ‘이흐람’으로 불리는 바느질하지 않은 흰천 두 장을 두르고 메카 주변의 성지들을 차례로 순례한다. 손톱과 발톱을 자르지 않으며 면도도 하지 않는다.
순례자들은 의식 첫날 예언자 마호메트가 했던 것처럼 메카에서 미나 평원으로 이동해 기도를 드리며 이날 밤 텐트에서 지새운 뒤 다음날 12㎞를 걸어 마호메트가 마지막 설교를 한 아라파트 동산에 올라 해질 때까지 기도한다.
순례자들은 또 순례기간에 성석(聖石)으로 불리는 ‘카바’를 7번 돌며 신에게 속죄를 간구하고 악마의 기둥에 돌을 던지는 의식 등을 행한다.
▼각지 종교 성지 순례는…▼
기독교 힌두교 불교 등 세계의 주요 종교들도 이슬람교의 하지와 같은 성지순례의 전통을 갖고 있다.
다만 기독교와 불교에서는 성지순례가 신도들이 정해진 때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사항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슬람교와 다르다. 힌두교도 성지순례 행사가 정기적으로 열린다.
규모만 놓고 보면 힌두교의 성지순례 행사 ‘쿰브멜라’가 하지보다 더 크다. 갠지스 강물에 몸을 씻으며 묵은 죄를 씻어내는 이 행사는 인도 북부의 소도시 알라하바드에서 12년마다 42일씩 열린다. 지난해 1월에는 신도 2500만명이 참여했다. 힌두교 경전에 따르면 알라하바드는 신들이 불로장생의 묘약을 뿌린 성지 중의 하나다.
기독교와 가톨릭 신도들은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한다. 예루살렘에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걸었던 ‘비아 돌로로사’나 예수가 부활한 장소에 세워졌다는 성묘교회가 있다. 예루살렘에는 또 유대교의 통곡의 벽과 이슬람교의 제3의 성지인 알 아크사 사원이 있어 순례객이 끊이지 않는다.
윤양섭기자 laila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