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르포]50년간 불타오른 '독립 횃불'

  • 입력 2000년 9월 24일 19시 00분


《티베트 최대의 백화점인 라싸(拉薩)백화대루(大樓) 맞은편에는 티베트자치구 인민정부 청사가 있다. 푸탈라궁에서 불과 300m 거리다. 인민정부 옆에는 티베트자치구 공산당위원회 건물과 무장경찰총대(總隊) 초대소가 있다.

티베트자치구 인민정부가 출범한 것은 1965년. 중국 정부가 수립된 지 16년 뒤에야 자치구정부가 구성된 것은 티베트 현대사를 바꾼 두 사건 때문이다.》

하나는 인민해방군의 진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던 날 주더(朱德) 총사령관은 “모든 미해방지구를 해방하라”“고 전군에 지시했다. 이에 따라 신장(新疆) 구이저우(貴州) 광시(廣西) 등지로 진격한 인민해방군은 이듬해인 50년 티베트로 진군한다.

티베트 해방을 책임진 덩샤오핑(鄧小平)이 직접 초안한 협상안도 티베트에 전달됐다. 달라이라마를 수반으로 한 티베트정부는 이를 받아들일지를 둘러싸고 찬반양론이 맞섰다. 그러나 그 해 10월 쓰촨(四川)성과 인접한 창두(昌都)에서 벌어진 첫 접전에서 티베트군이 대패하면서 양측 협상은 급진전됐다.

그 결과 51년 5월 양측은 ‘티베트 평화해방에 관한 17개 조항 협의’에 서명했다. 그 해 10월 인민해방군이 라싸에 입성했다.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8년 후인 1959년 봄이었다. 라싸와 산난(山南) 등지에서 대규모 반중국 시위가 발생한 것이다. 티베트인민출판사가 낸 ‘달라이라마를 들여다본다(透視達賴·1997년간)’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시위대는 흰색 깃발을 들고 시가지를 돌면서 구호를 외쳤다. ‘티베트는 독립했다’ ‘한인(漢人)은 물러가라’ ‘우리는 승리한다’. 기세는 흉흉했다….”

시위가 격화되자 중국은 이를 ‘티베트정부와 반동 상층집단이 제국주의 및 해외반동분자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란’이라고 규정하고 티베트에 주둔한 인민해방군에 진압을 명령했다. 그로부터 11일 뒤 달라이라마는 히말라야 국경을 넘어 인도로 망명했다. 59년 3월31일이었다. 600여명의 인사들이 25세의 달라이라마를 수행했다. 달라이라마는 이듬해 정식으로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정부가 사라진 티베트 내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은 티베트자치구 주비위원회가 토지개혁에 착수해 농노제를 폐지하는 등 구제도 타파에 들어갔다. 이같은 작업이 완료되면서 65년 인민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그러나 티베트는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소요사태는 꼬리를 물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시한폭탄처럼 남아 있다.

중국은 티베트 내의 반중국 정서를 가라앉히기 위해 그동안 ‘당근과 채찍’의 양면전략을 구사해왔다. 게포(加保) 티베트자치구 농업담당 부주석은 “중앙정부는 티베트에 큰 혜택을 배풀어왔다”며 “농민과 유목민은 세금을 면제받고 있다”고 말했다. 티베트 내 각 학교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원도 많다. 중국은 또 94년 “티베트를 빨리 부유하게 만들라”는 덩샤오핑의 지시에 따라 도로 등 티베트 기간시설 건설에 94년부터 99년까지 5년간 총 220억위안을투입했다. 이어 내지(중국 본토)에서 인력 상품 자본이 티베트로 몰려들었다.

티베트자치구 발전계획위원회 왕잉차이(王英才)처장은 “올해부터 티베트 개발을 포함한 서부대개발이 시작됨에 따라 앞으로 중앙정부의 지원은 더욱 커질 것”이라며 “‘티베트문제’는 국외에서나 하는 얘기지 티베트 내에서는 없다”고 강변했다. 라싸에서 만난 한 인사는 “시장경제화로 내지와의 통합이 가속화되고 있다”며 “정치 경제적으로 더욱 밀접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티베트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중국의 한 부분’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다시 분리로 치달을 것인가. 라싸에서 만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 중앙정부의 힘이 강력한 한 분리되지 않는다.”

▼티베트 불교와 정치▼

‘활불전세(活佛轉世)’ 신앙과 중세적인 장원경제가 합쳐진 것이 중국군 진주 이전 티베트의 정교일치제였다.

티베트 불교는 4대 종파로 나뉜다. 거루(格魯)파 닝마(寧瑪)파 거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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