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약세 나몰라라" 美 속뜻은?

  • 입력 1999년 9월 5일 18시 45분


“로렌스 서머스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미국 일본 유럽의 재무관료와 외환시장 관계자들은 요즘 서머스 미 재무장관의 일거수 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달러화가 유로화와 엔화 등 주요 통화에 대해 연일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도 서머스가 달러화 정책 방향을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

로버트 루빈 전재무장관 시절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외환시장 관계자들은 미 재무장관의 입장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루빈은 ‘강한 달러화 정책’의 신봉자였기 때문이다.

7월초 취임한 서머스는 다르다. 취임 기자회견에서 루빈의 ‘강한 달러화 정책’을 이어받겠다고 했으나 실제 행동은 이와 달랐다.

7월7일 그는 일본의 엔화강세 저지 통화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외환시장 개입보다는 내수 진작과 시장개방, 규제완화를 통해 경제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어 지난달 5일에는 엔화 강세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일본 정부와 공동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할 것이란 소문을 일축했다.

서머스가 이처럼 ‘강한 달러’를 말로만 외칠 뿐 필요한 조치를 직접 취하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현재 미국 경제의 최대 현안인 경기 연착륙을 위해서다. 경기 연착륙을 위해 무엇보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증시 거품을 걷어내는 것이다. 완만한 달러화 약세는 미국의 자산가치를 감소시켜 증시 거품을 해소하는 데 효과적이다.

두번째는 내년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천문학적으로 불어나고 있는 무역수지 적자를 해소하는 게 급선무다. 루빈 전재무장관은 무역수지 적자 감소를 위해 달러화 평가절하가 필요하다는 미 재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한 달러는 외국 기업의 미국내 직접투자를 늘리고 저금리 기조를 유지할 수 있어 궁극적으로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게 루빈의 ‘강한 달러론(論)’이었다. 이는 월가에서 잔뼈가 굵은 금융인(루빈은 골드만 삭스 공동회장 출신이다)의 시각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앨 고어 부통령이 당선될 경우 연임이 확실시되는 서머스는 경제의 기초를 따질 만한 여유가 없다.

서머스는 가격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달러화 평가절하가 필요하다는 자동차 농업 철강업계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만약 서머스가 외환시장에 개입해 달러화 약세를 저지한다면 산업계는 물론 정치권의 강력한 반발에 부닥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희성기자〉lee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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