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국 극복한 지도자들]리콴유 前싱가포르총리

  • 입력 1997년 11월 29일 20시 12분


서울보다 약간 큰 면적에 3백만명이 채 안되는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1인당 국민소득이 2만3천달러(96년)가 넘는 경제신화를 이룬 비밀은 리콴유(李光耀)전총리의 비밀을 밝히는 것과 같다. 싱가포르의 가로수 한 그루에도 그의 구상과 비전이 심어져 있고 국민들은 그의 이상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의 통치철학은 「대중보다 앞서가는 사고와 식견을 가진 엘리트를 중심으로 깨끗하고 능률적인 현대국가를 건설한다」 「지도자가 모범을 보인다(이신작칙·以身作則)」는 것이었다. 『내 아들이 총리이지 내가 총리는 아니지 않소』 리콴유총리가 31년간 총리를 지내는 동안에 줄곧 소규모 시계점 점원노릇을 했던 그의 부친의 이 말이 리콴유의 청렴 도덕성을 대변했다. 리콴유가 이끄는 인민행동당은 68년부터 80년까지 전의석을 휩쓸었으며 노동당 등 야당은 한두석을 차지하는데 불과했다. 그러나 선거에서 부정 타락선거가 행해졌다는 비난은 한번도 없었다. 그는 선거를 앞두고 선심행정은커녕 각종 사회악을 뿌리 뽑기 위한 「제재(制裁)행정」을 강화해 갔다. 그는 집권기간에 단 한번도 국민들의 인기에 영합하거나 자신의 인기를 높이려고 애써본 적이 없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오히려 그는 끝임없이 국민들에게 호통치고 훈계하고 공공연히 독재를 휘둘렀다. 반발도 있었지만 철저한 법집행으로 맞섰다. 그러나 그의 남다른 비전과 정직, 선진국가 건설과 국민에 대한 식을줄 모르는 애정 때문에 싱가포르 국민들은 그가 스스로 사임할때까지 변함없이 그를 지지했다. 미국이 그의 장기집권과 인권시비를 걸어왔을때 그가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라는 장문(長文)의 글을 통해 미국적 민주주의의 결함을 논리적으로 반박했던 일은 유명한 일화가 되기도 했다. 서구 언론이 싱가포르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기사를 쓰면 반드시 유력매체에 반론을 정연하게 펴 함부로 비판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싱가포르가 처음부터 잘 나가던 나라는 아니었다. 65년8월9일 온 싱가포르인들은 참담한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2년전 말레이시아의 한 주(州)로 합병됐다가 리콴유의 비범한 능력을 우려한 집권동맹당으로부터 축출당하다시피 쫓겨나 눈물로 분리독립을 선포하던 날이었다. 당시 이 나라는 가진 것이라곤 해변과 모래뿐 자원도 없고 지역도 협소한 도시국가로 화상(華商)들의 중개무역지에 불과한 상태로 약육강식의 국제사회로 내동댕이 쳐졌다. 리콴유총리는 독립을 선포하면서 『이 순간은 앞으로 되돌아볼 때마다 고통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대 희망은 이제 망가져버렸습니다』라고 비감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도 국민들도 같이 울었다. 리콴유는 우선 먹고 살길을 찾았다. 때마침 해외공장을 찾고 있던 선진국의 노동집약적인 산업을 유치, 일자리와 경제 발전의 터전을 마련했다. 70년대 초 아시아 각국에서 개발붐이 일자 그는 친구이자 재무장관인 고경쉬(吳慶瑞)와 함께 선진국도약의 길을 금융과 무역의 중계기지로 방향을 잡고 인프라 확충에 들어갔다. 배후의 동남아시장과 아시아와 유럽의 중계거점을 노린 것이다. 미래를 앞서 내다본 이 전략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80년대 서구 자본이 밀려오면서 싱가포르는 동남아의 금융중심지 및 고부가가치 산업 전진기지로 완전 탈바꿈했다. 그는 또 중국계 76%, 말레이계 15%, 인도계 7% 등으로 되어있는 다인종의 싱가포르 사회에서 인종간의 화합을 위해 철저한 평등주의와 능력위주의 정책을 펴 사회통합을 이뤘다. 위기도 있었다. 「아시아의 신화」를 일궈가던 85년 성장률이 제로에 가까웠다. 그해 8월18일 리콴유총리는 TV카메라 앞에서 도표를 제시하며 싱가포르의 지나친 임금인상이 국제경쟁력을 저하시켰다며 2∼3년간의 임금동결을 호소했다. 자신과 정부가 79년부터 전자산업 등으로 산업을 조정하면서 고임금정책을 펴온 것이 잘못됐음을 솔직히 시인하기도 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다운 논리적인 설득에 국민들도 이에 따랐다. 그는 국가의 기반이 잡혔다고 판단한 90년 총리직을 고척동(吳作棟)부총리에게 물려주고 2선으로 물러났다. 일부에서 이상국가를 꿈꾸는 독재자라고 평가하지만 그는 지금도 국제사회에서 싱가포르의 대부(代父)로 활동하고 있다. 〈홍콩〓정동우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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