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악한 괴물’서 ‘귀여운 반려동물’로 이미지 진화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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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드래곤 길들이기2’ 개봉을 계기로 본 21세기 미디어 속 서양龍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2’의 주인공 히컵(가운데·목소리 제이 바루첼)과 드래건 투슬리스. 이 영화에서 둘은 함께 난관을 헤쳐 나가는 전우(혹은 조력자) 관계로 그려진다. CJ E&M 제공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2’의 주인공 히컵(가운데·목소리 제이 바루첼)과 드래건 투슬리스. 이 영화에서 둘은 함께 난관을 헤쳐 나가는 전우(혹은 조력자) 관계로 그려진다. CJ E&M 제공
《 23일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2’를 보는 관객은 어쩌면 이렇게 되뇔지도 모르겠다. “정말 개…, 아니 용(龍)판이구먼.”
이 영화는 개체 수만 놓고 보면 ‘드래건 계의 오승환(끝판왕)’이다.
용이 한 1000마리쯤 날아다닌다. 날개가 넷이거나 얼음을 뿜는 등 종류도 각양각색이다. 최근 드래건은 영화나 TV의 인기 소재다.
지난달 시즌4가 종영한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영화채널 스크린)에는 무럭무럭 커가는 용 세 마리가 나왔다. 내년 시즌5로 돌아온다.
지난해 12월 영화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에서 위용을 드러낸 거룡 스마우그(Smaug)도 올해 말 ‘호빗: 다섯 군대의 전투’로 다시 만난다.
현재 누적 관객 약 500만 명인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엔 로봇 공룡(恐龍)이 나온다.
(서양 신화의 드래건은 공룡이 기원이란 학설도 있다.)
흥미로운 건 같은 용이라도 작품마다 해석 방식이 다르단 점이다.
서구 중세의 ‘전통적(orthodox)’인 드래건부터 오히려 동양사상에 어울리거나 혼종적인 성격을 지닌 용도 있다.
동서양 신화에 해박한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의 도움말과 영국학자 칼 슈커가 쓴 ‘드래건의 자연사’(1995년)를 통해 21세기 미디어 속 서양 용을 살펴봤다. 》

▼ ‘호빗’ 스마우그 ▼
탐욕과 파괴의 화신… 중세적 세계관 반영


지난해 영화 ‘호빗’에서 분노에 가득 차 성을 뛰쳐나간 스마우그. 올해 말 선보일 영화에서 제대로 분탕질을 선보일 이 드래건은 전형적인 서구문화 용 이미지에 가장 가깝다.

그런데 ‘용=악한 괴물’ 설정은 유럽 중세시대에 자리 잡은 개념이다. 드래건은 고대 그리스어 ‘드라콘’에서 유래했는데, 주로 커다란 뱀을 지칭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뱀은 인간에게 원죄를 떠안긴 장본인. 때문에 성화에는 성모가 용을 발로 밟고 있는 묘사가 잦다. 스마우그가 황금에 대한 탐욕이 남다르며, 매우 포악하고 교활한 성격을 지닌 것에도 이런 의식이 깔려 있다.

머리 하나가 사람 몇 배나 되는 스마우그의 엄청난 덩치도 전통이 깊다. 로마시대 작가인 클라우디우스 아엘리아누스는 저서 ‘동물의 본성’에서 “용은 최대 180피트(약 55m)까지 자란다”고 묘사했다. 수명도 1만5000∼2만 년이다.

사료에 최초로 등장하는 드래건은 어떤 모습일까. 학자들은 기원전 2000년 전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괴물 훔바바(humbaba)를 용의 원류로 친다. 입으로 불과 독을 내뿜고 꼬리가 뱀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론 거인의 형상이었다. 공룡 등에 박쥐 날개가 달린 익숙한 생김새는 영문학 최초 서사시인 ‘베어울프(Beowulf·8세기경)’에서 찾을 수 있다. 영웅 베어울프가 화룡(火龍)을 무찌르는 대결구도 역시 등장한다.

▼ ‘왕좌의 게임’ 드로곤 ▼
왕을 상징하는 매개체… 동양적 용에 가까워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대너리스 공주(에밀리아 클라크)는 칠왕국을 다스렸던 타르가르옌 왕조의 적통. 하지만 반란으로 나라를 뺏긴 뒤 이국에서 떠도는 거지 신세로 전락한다. 막다른 길에 몰린 공주에게 부활의 명분을 선사하는 존재가 바로 용이다. 불 속에서 품은 알에서 드로곤(Drogon) 등 3마리의 드래건이 깨어남으로써 공주는 ‘용의 어머니’로 여왕의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서 용은 서양보다 동양적 정서에 부합한다. 동양 용은 고대 인도신화에서 출발해 동북아시아에서 꽃피는데, 제왕의 권력을 나타내는 피조물이었다. 특히 농업과 어업이 중요했던 한국과 중국에서 용은 기후를 다스리는 존재로 추앙받았다.

‘왕좌의 게임’에서 드래건이 몇백 년 동안 나타나질 않자 사람들은 미신으로 치부하거나, 이미 멸종했다고 여기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조선시대엔 용의 실존 여부를 놓고 조정에서 격론이 벌어진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 세종 18년(1436년) 제주 안무사로부터 ‘용 다섯 마리가 승천했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 천 관장은 “이 보고를 두고 대소 신료가 4년이나 논쟁을 벌였지만 끝내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특이한 건 만사를 과학적으로 봤던 실학자 이수광(1563∼1628)과 이익(1681∼1763)도 각각 전북 익산과 경기 포천에서 용을 직접 봤다는 글을 남겼다.

▼ ‘드래곤 길들이기2’ 투슬리스 ▼
인간을 지키는 든든한 존재… 바이킹 시대에 부합


1편에 이어 주인공 히컵의 다정한 벗인 드래건 투슬리스(Toothless)는 애매한 존재다. 하늘을 날고 불을 뿜는 용은 확실한데, 전통적인 드래건과는 다르다. 딱 타기 좋은 말만 한 크기에 혀로 주인을 핥는 강아지나 할 법한 행동을 한다. 해맑은 눈망울을 보라. 실제로 많은 관객들이 1편을 보고 나서 “애견이 떠올라 뭉클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영화에서 드래건은 괴수보단 반려동물에 가깝다.

이런 ‘하이브리드(hybrid·혼종)’ 드래건은 분명 미국 할리우드의 상업적 의도가 작용했을 터.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도 그다지 틀린 건 아니다. 중세 이전 드래건은 예상보다 긍정적이고 친근하게 그려진 경우가 적지 않다.

학계에선 용에 대한 개념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문명 때부터 이미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초기엔 드래건에 대한 선악의 잣대가 엇갈렸다.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유럽 상당수 지역에선 인간의 재물을 지켜주는 착한 동물로 여겼다. 영화 속 히컵의 종족인 ‘바이킹’이 대표적이다. 8∼10세기에 바다를 주름잡았던 노르만족은 배에 용 그림을 새기곤 했다. 거친 날씨와 적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는 신수(神獸)로 믿었기 때문이다. 천 관장은 “종교적 세계관에 자연을 인간의 정복 대상으로 보는 근대적 사고방식이 겹치며 용을 무찔러야 할 상대로 보는 고정관념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용#드래곤 길들이기#왕좌의 게임#호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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