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히어애프터’ 화법

  • Array
  • 입력 2011년 3월 29일 03시 00분


코멘트

거장감독은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
관객 가슴이 찢어지도록 보여줄 뿐

《올해로 81세가 된 배우 출신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신작 ‘히어애프터(Hereafter)’를 보고 나서 쇼크를 받았다. 이렇게 간결하고 ‘쿨’한 화법을 여든이 넘은 감독이 어찌 구사할 수 있는가 말이다. 이 영화는 단도직입적으로 ‘죽음’을 다룬다.》

영화 ‘히어애프터’의 영국인 소년 마커스는 쌍둥
이 형을 잃고 그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심령술사를 찾아다닌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영화 ‘히어애프터’의 영국인 소년 마커스는 쌍둥 이 형을 잃고 그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심령술사를 찾아다닌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죽음을 잠깐 경험했던 여자와 남의 죽음이 늘 눈에 보여 고통스러워하는 남자,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아이를 통해 끈질기게도 죽음을 탐구한다.

이스트우드가 영화를 통해 던지는 질문은 심오하지만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죽으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늘 죽음이 궁금하다. 하지만 누구도 죽고 싶지는 않다. 꼭 죽어야 한다면, 좋고 평화로운 곳으로 가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쓸쓸하고, 때론 절대자에 의지하며, 살아도 늘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을 알든 모르든 우리는 어차피 죽는데 말이다.

이스트우드가 진정 거장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영화의 주제의식 때문이 아니라 화법 때문이다. 이스트우드는 죽음을 형이상학적인 담론으로 여기지 않는다. 단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당도하는 종착역으로 생각한다.

유명한 데다 수많은 성공작을 축적한 이 노감독은 도무지 잔소리가 없다. 자기 확신도 강요도 없다. 그는 ‘죽음은 이러하다’고 정의내리지 않으며, 관객이 알아들을 때까지 한 얘기를 또 하며 선동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그는 결론도 내지 않는다. 그는 죽음이 궁금해 이 영화를 만들었고, 이 영화를 만든 후에도 여전히 죽음을 알지 못한다.

이스트우드는 뜨겁게 흥분하여 말하지도 않고, 차갑고 냉정하게 말하지도 않는다. 과도하게 몰입하지도 않고, 건조하게 관조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차갑고, 또 뜨겁다. 죽음에 대해 뭔가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할 만한 대목에 이르면 그는 여지없이 입을 다물고 휙 다른 장면으로 숙명처럼 도망간다. 어찌 보면 이스트우드는 참 잔인하고 야속한 감독이다. 실컷 느끼고 생각하게 만들어놓고는, 관객의 가슴에 짙은 멍울만 심어놓은 채 ‘결국 해답은 우리 모두가 찾아 헤매는 것’이라며 돌아서니 말이다.

그에겐 ‘예술’을 하겠다는 자의식이 없다. 그 대신 그는 미치도록 뭔가를 궁금해 한다. 그래서 늙어갈수록, 더 많은 영화를 만들수록 그는 더 현명해진다. 그는 뭔가를 말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토록 하고픈 말을 끝까지 참아내는 더 크고 성스러운 능력을 가졌다. 그는 마치 자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만 같다. 영화를 통해 그는 질문하고, 결국 그 답을 얻지도 못하며, 답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또 솔직하게 고백한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노장은 될 수 있지만 거장이 되는 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추태에 가까운 작품을 만들며 그를 아름다운 추억의 상자 속에 담아두고자 했던 우리들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감독도 있다. 풋내기는 아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하고, 거장은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가짜는 사람들이 이걸 알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진짜는 나 자신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예술을 한다. 노장은 마침표를 찍지만 거장은 물음표를 던진다.

예술은 죽음 때문에 탄생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이 영원하다면, 삶이 더는 소중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운명이란 있을까. 왜 그는 죽고, 나는 살아남을까. 끝없이 죽음을 생각하는 삶은 살아있는 걸까, 죽은 걸까.

히어애프터를 보면 허공이 보인다. 그래서 삶도 보인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