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황윤정] 충무로 백여우(百女優)-이은주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25일 15시 00분


코멘트
2월이면 떠오르는 그녀, 가버린 그녀에 대한 단상

5년 전, 2005년 2월22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함박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전날 필자는 작가들과 함께 시나리오 회의를 위해 양평으로 MT를 갔었고, 밤새 내린 눈으로 혹시 교통이 마비될까 노심초사하며 서울로 발걸음을 돌리던 길이었다.

배우 이은주는 가장 극적으로 스러져간 마지막 은막의 스타다. 동아일보 DB
배우 이은주는 가장 극적으로 스러져간 마지막 은막의 스타다. 동아일보 DB


미끄러운 시골길을 조심스레 운전한다고 했는데,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로 들어서던 찰나 빙판길 위에서 차가 미끄러져 거의 한 바퀴를 돌았다. 마침 주위에 차가 한 대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큰 낭패를 볼 뻔 했다.

그렇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서울로 향하던 순간 믿고 싶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그 소식은 차가운 휴대전화를 타고 귓가에 전달됐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내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울림을 안겼다.

"은주가 죽었대, 자살이래…."

필자의 머릿속은 그 날, 세상을 온통 하얗게 뒤덮었던 그 흰 눈만큼이나 하얘지고 말았다. 그리고 운전하는 내내 주마등처럼 이어지는 그녀에 대한 복잡한 기억들로 인해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말았다.

▶ 2월22일은 은주의 5주기


그녀의 고향은 군산이라고 했다. 어릴 적, 피아니스트를 꿈꾸었던 소녀 이은주는 대부분 여자 연기자들이 그러하듯, CF 모델로 시작하여 TV 드라마를 거쳐, 1999년 '송어'라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존재감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이어서 홍상수 감독의 걸작 '오! 수정'에서 어린 나이답지 않은 과감한 노출연기를 감행하며 열연, 문성근과 정보석이란 노련한 베테랑 배우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도 대중들에게 자신의 무게감을 분명하게 각인 시킬 수 있는, 이른바 주목받는 여배우로 급부상했다.

한류스타 이병헌과 열연한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그녀는 속깊은 이미지 때문인지 언제나 가련하게 죽어가는 비련의 연기를 펼쳐야 했다.
한류스타 이병헌과 열연한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그녀는 속깊은 이미지 때문인지 언제나 가련하게 죽어가는 비련의 연기를 펼쳐야 했다.


이 작품이 개봉하던 2000년 5월 어느 날, 모 극장 부근 커피숍에서 필자는 당시 스무 살에 불과했던 이은주를 처음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배우라기보다는 그냥 평범한 여대생 같은 느낌을 건넸다. 그럼에도 쉽게 말을 걸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하고 조용하면서도 강인한 느낌을 동시에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간간히 영화 현장에서, 그리고 극장에서 이은주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분명 '예쁜 배우' 이상의 무언가 특별한 것이 존재했다. 아마도 영화계 관계자라면 누구라도 그 특별함을 인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170cm의 큰 키에 백옥 같은 피부와 사슴 같은 눈망울, 단아한 외모, 다소 고독해 보이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진 그녀는 차가운 카리스마와 천진스러운 미소를 동시에 갖춘 야누스적인 매력으로 출연하는 작품마다 자신의 혼을 불어넣었다. 어느 영화라도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왠지 모르게 운명적 느낌을 뿜어냈다.

그랬기 때문일까, 그녀는 유독 죽는 역할로 자주 등장했다. '번지점프를 하다' '연애소설' '태극기 휘날리며'가 그녀가 죽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그런 죽음의 이미지 때문인지 그녀는 하얀 여백이 더 많은, 그래서 무엇이라도 더 채워 넣어줄 수 있는, 그렇게 맑고 투명한 배우였다.

그리고 성공을 마다하고 매번 새로운 실험에 도전장을 내밀며 또래의 배우들과는 전혀 다른 영화 배우의 길을 걸어갔다.

2000년 '오 수정'을 시작으로 '번지점프를 하다' '하얀 방'(2002) '연애소설'(2002), '하늘정원'(2003) '안녕! 유에프오'(2004), '태극기 휘날리며'(2004), '주홍글씨'(2004년) 까지….

물론 그녀의 도전이 늘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만의 독특하고 확실한 색깔을 대중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아로새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19살에 첫 영화에 출연해 영화계에선 불과 6년, TV드라마 이력을 합쳐도 8년이라는 짧은 연기 생활을 통해 대중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아로 새겨 놓은 것이다.

▶ '예쁜 배우' 이상의 무언가 특별함

이제와 고백하지만, 필자는 2003년에 그나마 제대로 이은주를 만날 수 있었다. 영화로서는 이은주의 유작이 되어버린 '주홍 글씨' 바로 직전, 한석규 유준상 등과 함께 촬영을 진행하며 여러 우여곡절 끝에 제작이 중단되었던 '소금인형'이 바로 그것이다.

이 영화는 납치된 아내를 구하려는 한 남자(한석규)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은주는 납치당하는 아내 서지호 역을 맡았다. 아들을 잃고 그 뼛가루를 바다에 뿌린 슬픔 속에 사는 그녀는 또다시 이유를 알지 못하는 납치로 인해 격한 심리적 변화를 경험한다는 내용이다.

이은주 씨가 남긴 유서. ‘엄마 미안해. 사랑해’라고 쓴 혈서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돈을 벌고 싶은데… 힘든 세상이야’라고 토로하고 있다. 연합
이은주 씨가 남긴 유서. ‘엄마 미안해. 사랑해’라고 쓴 혈서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돈을 벌고 싶은데… 힘든 세상이야’라고 토로하고 있다. 연합


2003년 말 진행된 영화 '소금인형'에서 이은주가 맡았던 역할도 마치 '주홍 글씨'에서처럼 팜 파탈이었고, 적지 않은 분량의 노출과 정사신이 있었으며, 한 인물을 놓고 서로 엇갈리는 진술 속에 마치 1인 2역을 하듯, 인간의 선함과 악함을 동시에 표현해 내야 하는 어려운 연기를 펼쳐야 했다.

이 작품을 준비하며 이은주는 철저하게 자신의 캐릭터를 분석했으며, 어느 것이 진짜 모습인지 헷갈리게 할 만큼,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쏟아 붓는 열정을 보였다. 그리고 배역에 몰입한 만큼, 그만큼 더 연기하기 수월하도록 그 배역의 캐릭터-남편의 외도와 아들의 죽음으로 힘겨워하는 아내-에 흠뻑 빠져 일상에서조차 우울한 감정을 계속 유지하고 노력했다. 분명 또래 여배우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세심한 열정이었다.

원래 천성도 조용한 편이었던 데다가 이러한 배역에 더 몰입을 해서 감정까지 조절하고 있는 상태였으니, 당연히 작업을 하는 동안 내내 그녀는 너무도 고요했으며, 따라서 필자는 이은주와 사적인 교류를 많이 나눌 수도 없었다.

다만 그녀는 조금 특별하게 제작진과 교감을 나눴다. 스탭들의 밤샘작업이 안쓰러웠던지 이들의 건강까지 염려하여 그녀는 은밀하게 비타민과 영양제 등 놓고 갔던 것이다. 그런 배려를 통해 '참 마음이 따뜻하고 속정이 깊은 친구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렇게 그녀가 몰입을 했던 영화는 그녀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복잡한 제작진의 문제로 인해 제작이 중단되기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 이은주에게도 큰 아픔과 상처를 남기게 됐다.

▶ '주홍 글씨 '이전에 '소금 인형'으로 속앓이

영화 ‘주홍글씨’ 중 재즈를 부르는 대목. 그녀의 유작이 된 이 영화에서 그녀는 보석과 같이 영원히 빛나고 있다.
영화 ‘주홍글씨’ 중 재즈를 부르는 대목. 그녀의 유작이 된 이 영화에서 그녀는 보석과 같이 영원히 빛나고 있다.


그리고 '소금인형'이 중단 된 지 2년 후, 그렇게 아름답고 총명했던 배우 이은주는 스물다섯의 빛나는 젊음을 뒤로 하고 스스로 불꽃같은 짧은 생을 마감하며 한줌의 재로 산화해 버렸다.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한동안 무성한 추측과 소문들이 나돌았다. 그 속에는 연기에 대한, 캐릭터에 대한 몰입과 여배우로서 노출에 대한 부담감 등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필자도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그렇게 죄인 중의 한 사람이 된 듯한 심정이었음을 진심으로 고백한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내색하지 못했던 그녀의 외로움을 왜 그때 미리 눈치 채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고 조금 더 배려해주지 못했던가 하는 깊은 회한도 밀려온다. 혼자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마지막 순간을 준비했을 그녀의 모습이 눈동자에 아른거려서, 그래서 더 하염없는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었음을 말이다.

아마도 나만의 특별한 기억이 아니라 그녀와 교류했던 영화 기획자들은 대부분 이런 감상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은 한국 영화계에 큰 상처로 기억되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를 보내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그 사람의 흔적을 가슴에 품고 담아두는 일이다.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많이 성숙해 버린, 우리 시대의 여배우 이은주…. 지금 이 순간, 나는 그녀가 사무치게 그립다.

황윤정 / 영화 프로듀서

칼럼 더보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