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걸에 눌린 찌질남들, 요즘 남자와 닮았다?

  • 입력 2009년 8월 4일 02시 59분


드라마 ‘선덕여왕’ 통해 본 ‘못난남자’ 캐릭터 분석

《MBC 월화드라마 ‘선덕여왕’이 지난달 28일 20회 방영에서 34.6%(AGB닐슨미디어리서치)의 시청률을 올렸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주인공 덕만(이요원)이 생모 마야부인(윤유선)과 대면하는 뭉클한 장면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 사극은 출생의 비밀 외에도 미실(고현정)을 둘러싼 ‘다각(多角) 관계’ 등 현대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를 도입했다.

특히 이 드라마에서는 선덕여왕과 미실을 중심으로 줄지어 등장한 ‘못난 남자’들의 모습이 흥미롭다. 신라의 영웅인 김유신(엄태웅)은 앞뒤 꽉 막힌 ‘초식남’(草食男·여자에 관심 없이 자기 취향에만 몰두하는 남자로 일본에서 유행하는 신조어)으로 묘사된다. 이처럼 여걸에 억눌린 남성 캐릭터들의 ‘찌질함’이 요즘 남자들의 모습과 겹치면서 묘한 공감대를 자아내고 있다.》

○ 초식남 김유신
무책임하고 꽉 막힌 영웅

○ 순정남 설원
연정에 목숨건 엘리트관료

○ 기생남 미생
눈치-아첨으로 뭉친 난봉꾼

○ 답답한 ‘초식남’ 김유신

김유신은 삼국통일을 주도한 영웅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소심하고 이기적인, 앞뒤 꽉 막힌 초식남이다. 갑옷 두르고 칼을 찼을 뿐, 같은 시간대에 방영 중인 KBS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의 소심한 건축가 조재희(지진희)에 비해 딱히 더 박력 있어 보이진 않는다. 김유신은 아역으로 처음 등장했던 7회부터 초식남의 떡잎을 보였다. 초면인 천명공주 앞에서 느닷없이 ‘1만 번 베기’ 검술 연습을 시작하더니 9925번을 채운 뒤 “잡념이 들어갔다”며 1부터 다시 시작한다. 울화통이 터진 공주는 “낭도들을 통솔하기 위해서 뭐라도 재주를 보여야 할 판에 우둔한 머리로 짜낸 술수가 겨우 우직한 성실함인 게로구나”라고 꾸짖는다.

20회에서는 출생의 비밀을 알고 혼란스러워하는 덕만에게 실질적인 충고나 도움은 못 주면서 무작정 “떠나지 말라”고 무책임한 애원만 하다가 “네가 계속 간다고 하면 난 널 가둬두는 것밖에 방법을 모른다”고 말한다. 인간관계의 발전에 따르는 책임감을 번거로워하고 편리함만 추구하려 드는 요즘 초식남과 다를 바 없다.

○ 비현실적 ‘순정남’ 설원

설원(전노민)은 신라 병부를 총괄하는 두뇌가 명석한 엘리트 관료다. 하지만 그 껍데기 속에는 미실에게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긴 채 평생 순종하는 정부(情夫)가 들어 있다.

1회에서 그는 남편 있는 여자 미실에게 “4년 전 모든 것을 당신에게 걸었다. 나의 운명, 신라의 운명까지”라며 사뭇 비장한 어조로 충성을 가장한 연심을 고백한다. 일방적인 로맨티시즘에 취해 한 나라의 군대를 이끄는 장교의 본분을 망각한 처신이다. 결혼기념일 밤에 다른 정인(情人)을 챙기다가 멀쩡한 조강지처를 잃은, MBC 드라마 ‘트리플’의 엘리트 직장인 신활(이정재)과 비슷한 인물이다.

○ 몰염치 ‘기생남’ 미생

미생(정웅인)은 자식을 100명이나 둔 희대의 난봉꾼. 잘난 누나 미실 덕에 고위 관료가 됐지만 19회에서 ‘한 번 본 여자 얼굴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능력’을 선보인 것 외에는 활약상이 없었다. 생존을 위해 그가 동원하는 기술은 눈치 빠른 아첨. 5회에서 “진골에게 태자 자리를 줘서는 안 된다”고 강경하게 주장하다가 미실이 다른 의견을 내자 곧바로 표정을 싹 바꿔 “역시 넓은 안목”이라며 경망스럽게 웃는다. 매회 그가 등장하는 장면은 늘 이런 유형으로 진행된다. 미실의 ‘형식적 남편’ 세종(독고영재)과 아들 하종(김정현)도 미생과 같은 신세다. 공부도 일도 할 만큼 했지만 독립해서 가정을 꾸릴 깜냥이 부족한 KBS 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의 못난이 4형제와 닮은꼴인 남자들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이지연 기자 chance@donga.com

유혜진 인턴기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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