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칼럼]고경자/우리 가족의 'TV탈출'

  • 입력 2003년 10월 20일 18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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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 이별의 상처를 남기고 떠나면 그만이라지만, 대자연은 모질었던 태풍의 상처를 씻어주려는 듯 푸른 하늘과 여문 들녘을 가슴 가득 안겨주고 있다. 밤하늘 곳곳에는 문화축제의 불꽃이 퍼지고 국화향기 가득한 거리는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고교3학년 수험생이 있는 가정에서는 소리 없는 입시전쟁이 치러지고 있다. 수험생들은 푸른 하늘도, 아름다운 축제의 불꽃도 잊은 지 오래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의자에 앉아 생기는 ‘고3병’인 변비와 엉덩이 종기까지 감내하면서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격전의 순간을 향해 나아가는 아이들의 어깨가 유난히 무거워 보인다.

엄마는 수험생의 건강과 스트레스를 달래느라 애를 쓰고, 아빠는 과외비 학원비 뒷바라지에 등이 휜다. 동생도 오빠를 위해 제가 누릴 몫을 양보한다. 마치 온 가족이 릴레이 경주 선수처럼 긴장되고 힘들지만, 전력질주를 위해 조금은 뒤로 물러서서 뛰어야 하는 바통터치의 순간처럼 지혜롭게 마음을 하나로 이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집안에서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퇴근한 남편의 유일한 휴식처인 거실에서의 TV 시청 때문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소리를 줄이든가 방에 들어가 자라고 했는데 내 뜻을 받아주지 않아 목소리가 높아졌다. 남편은 “내가 무슨 죄인이냐”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편의 속좁음을 탓하고 있는데 방에서 공부하던 아들이 나오더니 “엄마, 사실 우리 집에서 아빠가 제일 ‘왕따’인 것 아세요? 우리하고 대화상대도 안되고, 엄마는 늘 우리만 챙기니까 말이에요. 아빠도 직장에서 말 못할 일 많으실 거고 집에서 좀 풀려고 하는데 엄마가 이해하세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속이 좁은 건 남편이 아닌 필자였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우리 부부는 아들의 건의로 시험기간 중에는 TV 시청 대신 신문이나 책을 읽기로 했다. 공원을 달리며 게을리 했던 운동도 하고 냉담했던 이웃과 자연스럽게 만나기도 했다. TV에 빼앗겼던 딸의 시선을 마주하며 대화도 하고 사색의 시간도 많아졌다. ‘TV 탈출’은 놓칠 뻔했던 삶의 풍요를 다시금 건져 올리는 좋은 기회가 된 셈이다.

고경자 경기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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